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
![]() ▲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
지하 룸싸롱의 두꺼운 방음문을 밀자, 은은한 조명이 깔린 넓은 프런트가 눈에 들어왔다.대리석 바닥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천장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복도 벽면엔 르누아르 풍 유화와 청전 이상범 산수화를 본뜬 대형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모조품이라지만 화필이 정교해, 웬만한 눈으로는 진품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면 모조품이라도 값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값비싼 원목 가구와 최고급 가죽 소파, 쾌적한 공기와 정제된 향.이곳이 지하 룸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해운대 조선비치호텔 인테리어를 맡았던 업체에서 직접 시공했다는 칠근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회원제 살롱.부산시장을 위시한 국회의원, 대기업 오너, 언론사 간부, 대학병원 원장 같은 인사들이 사적으로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시의원 정도는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한다 했다. 이곳에서는 술보다 인간관계가 더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VIP 룸 테이블 위엔 고래 턱살과 눈살 같은 특수 부위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야마자키 18년, 히비키 21년, 그리고 레미 마르탱 루이 13세가 케이스 안에서 고요히 빛을 내고 있었다.
칠근은 내가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든 나를 이쪽 세계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 한 병 값이면 내가 장터를 몇 달이나 돌아다녀야 벌 수 있을지 계산하다가 그만두었다.
칠근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잔을 건넸다.
"야, 성호야, 이런 술 니 평생 마셔 봤나? 세상은 이런 판에서 굴러가는 기다"
그의 얼굴은 전작이 있었는지 약간의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큰 판, 주빈 자리에는 세 번째 만남이 되는 안 여사가 앉아 있었다.그녀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엔 여유와 준엄함이 동시에 엿보였다. 어떠한 사람 앞에서도 도도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 특유의 태도가 오늘따라 확실하게 느껴졌다.
"성호 씨, 지난번에도 내가 잠깐 얘기했죠. 내가 괜히 이런 말 하는 거 아냐. 장길녀 대표 같은 사람, 아무나 다가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학력이나 배경에 목을 거는 사람도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 같은 인재가 옆에 있으면 서로 보완이 되죠"
그녀의 말투엔 설득이라기보다 이미 결정된 일을 통보하는 것 같은 단호함이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끌려가는 기분과, 혹시 내게 올지 모를 기회에 대한 욕망, 그 두가지 감정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돈과 권력으로 얽힌 관계 속에 내 삶을 던져도 되는 걸까하는 망설임까지.
그때 칠근이가 잔을 탁 내려놓았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야, 복잡할 거 뭐 있노. 그냥 장길녀 대표 한번 만나 봐라. 니 지금 하는 장사, 죽어라 해 봐야 언제 사람 구실 하겠노? 생각 좀 해 봐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야, 그게 말처럼 쉽나. 안 여사님도 그렇고 너도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건 잘 알아. 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을 돈 때문에 만난다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난 건 아니잖아"
안 여사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성호 씨, 사람답게 사는 거요? 그것도 결국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에요? 그게 꼭 돈만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여유도 없잖아요. 서양 속담에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뒷담을 넘어 도망간다는 말이 있다지요"
그녀의 말에 선뜻 대꾸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장 내 처지를 돌아보면 반박할 말도 없었다.
안 여사는 술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게 일본 바이어들을 접대하는 자리였어요. 남자 사장들이 열 명도 넘게 있었죠. 장 대표가 자리에 앉자 큰소리로 떠들던 사람들도 하나둘 말을 줄이더군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 대표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어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이 왜 나를 만납니까?"
"그게 궁금하죠? 장 대표 주변에는 돈을 보고 접근하는 남자가 너무 많았어요. 사업을 도와주겠다,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 평생 곁에 있겠다. 말은 다 그럴듯했죠. 하지만 결국 그들이 필요로 한 건 장 대표의 돈과 인맥이었어요"
"나라고 다르겠습니까?"
안 여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바로 그 점이 성호 씨의 매력이에요. 자기 처지가 어려우면서도 돈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건 싫다고 버티고 있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장 대표가 찾는 사람이 어쩌면 성호 씨 같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히려 더 불편해졌다. 내가 돈을 탐내지 않는 사람이라서 선택될 수 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들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돈이 절실한 사람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칠근이가 의자를 끌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야, 니 지금 큰 도박판 앞에 서 있는 기다. 이기 보통 판이가? 다 떨어진 도바 물건 몇 장 파는 장사가 아이다. 니 학벌도, 경력도, 살아온 인생도 이번에는 전부 걸어 보는 기다. 내 장담하는데 니 인생에 이런 판 다시 안 온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니 마음은 안다. 그래도 나는 아직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돈만 보고 살 거였으면 내가 은행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왜 그만뒀겠노"
칠근이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씨잘데기 없는 소리 그만해라!"
테이블 위의 잔이 흔들렸다.
"니캉 내캉 범냇골 산만디에서 같이 자랐잖아. 니 잘되면 내 일처럼 좋았고, 니 대학 붙었다는 소리 들었을 때도, 은행 들어갔다는 소리 들었을 때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나? 니 모르게 술 사 묵고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자랑했다. 한성호가 내 친구라고"
칠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술잔을 들려다 말고 다시 내려놓았다.
"어릴 때 헤어진 뒤로 연락은 끊겼어도 나는 니 소식 챙겨 봤다. 그런데 신문사 그만두고 나서는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가 없더라"
칠근이가 내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지금 니 꼴 좀 봐라. 장마에 비 맞아 가면서 장터 돌아다니는 니 모습을 너거 어머니가 봤으면 가슴 안 찢어지겠나?"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내 마음이 그렇다"
칠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솔직히 니가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자리까지 마련하면서 애쓰는지, 니 정말 모르겠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칠근이가 나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늘 그 여자 만나겠다고 내한테 약속하기 전에는 니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그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내 말 명심해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웠다. 양주잔 속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안 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호 씨,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누가 지금 당장 결혼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맡기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 만나 봐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돌아서도 늦지 않아요. 사람을 만나 보기도 전에 돈 때문에 만나는 거라고 단정하는 것도 성호 씨답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 말에는 선뜻 반박하기 어려웠다.
칠근이가 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성호야, 안 여사 말대로 해라. 딱 한 번만 만나 봐라. 만나 보고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는 내가 다시는 이 이야기 안 꺼내겠다"
평소 같았으면 어림없는 제안이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 친구의 말이라도 `택도 없는 소리`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겨울 밀양장에서 손님이 두고 간 지갑을 바라보며 흔들렸던 내 모습을 떠올리자 생각이 달라졌다. 주인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지갑 속의 돈이 먼저 떠올랐고, 차라리 들고 도망치지 못한 것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도둑이 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나는 가난했고 절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