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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김 칼럼]
독일의 실버, 삶의 맛과 세월의 멋

늙음을 감추지 않고 자기답게 익어가는 사람들

[잉글랜드김 칼럼]
독일의 실버, 삶의 맛과 세월의 멋

늙음을 감추지 않고 자기답게 익어가는 사람들

창원일보 | 입력 : 2026/07/2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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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국(대구가톨릭대 창업경영학과 교수 / 논설위원 / Saxophonist / 교육부ㆍ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상)    

필자는 방학 때마다 독일을 찾는다. 때로는 여행자의 눈으로 도시와 자연을 둘러보고, 때로는 자식 곁에 머물며 독일인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독일인 사돈과 사위, 손주들, 그리고 이웃들의 일상까지 자연스럽게 접한다. 지금은 독일에 장기 체류 중이다.

 

관광지의 겉모습을 넘어 시장과 공원, 골목과 카페에서 평범한 삶의 속살을 만난다. 곳곳에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고, 서두르지 않는 느림과 타인을 먼저 헤아리는 배려가 있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필자의 시선이 유난히 오래 머무는 대상은 독일의 노년, 곧 이 나라의 실버들이다.

 

독일의 거리에서는 노년이 숨지 않는다. 은빛 머리를 굳이 검게 물들이지 않고, 오래된 외투를 단정하게 걸친 채 자전거를 탄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찾고, 카페 창가에 홀로 앉아 신문을 읽는다. 혼자 식사하고 혼자 여행하는 모습도 자연스럽다. 누구의 부모나 조부모이기 전에 독립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 당당함과 느긋한 여유가 독일 실버의 첫 번째 멋이다.

 

그들의 멋은 화려한 치장과 거리가 멀다. 비싼 옷보다 몸에 잘 맞는 옷을 고르고, 유행보다 실용을 중시한다. 오래 신은 구두는 깨끗이 닦여 있고, 낡은 가구와 찻잔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낡았다는 이유로 쉽게 버리지 않는다. 고쳐 쓰고 닦아 쓰며, 오래된 물건과 함께 늙어간다. 새것을 자랑하기보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존중한다. 멋이란 남의 시선을 끄는 장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단정히 가꾸는 태도임을 보여준다.

 

삶의 맛 또한 소박하고 담백하다. 빵과 치즈, 감자와 채소, 소시지와 따뜻한 수프가 일상의 식탁을 채운다. 지나치게 많이 차리지 않고 먹을 만큼만 준비한다. 천천히 음식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간다. 식탁은 부를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연결하는 자리다. 값비싼 보약이나 건강식품보다 규칙적인 식사와 산책, 정원 가꾸기와 자전거 타기를 더 신뢰한다. 건강은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매일 반복하는 생활 습관에서 온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천한다.

 

독일 노년의 또 다른 품격은 은퇴 이후에 드러난다. 직장을 떠났다고 세상과 결별하지 않는다. 지역 도서관과 교회, 시민단체와 스포츠클럽에서 봉사한다. 평생 익힌 기술과 지식을 다음 세대와 나누고, 여행과 음악, 독서와 정원 가꾸기로 자신의 시간을 채운다. 손주를 사랑하지만 노년의 모든 시간을 자녀와 손주에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가족을 돕되 자신의 삶도 지킨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또 하나의 독립된 계절로 받아들인다.

 

물론 독일의 노후라고 해서 모두 평온한 것은 아니다. 연금 격차와 고독, 질병과 요양 인력 부족은 이곳에서도 현실적인 문제다.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늙음의 불안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독일 사회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노인을 단순한 부양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마지막까지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보호하되 간섭하지 않고, 돕되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사회의 노년은 아직도 자녀의 성공과 재산의 크기로 평가받기 쉽다. 젊어 보이는 외모와 값비싼 소비가 품격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은퇴한 뒤에는 사회적 역할이 끝난 듯 스스로 물러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노년의 진정한 품격은 얼마나 젊어 보이느냐에 있지 않다. 자신의 하루를 스스로 꾸리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작은 책임을 놓지 않는 데 있다.

 

독일의 실버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필자는 잘 늙는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잘 늙는다는 것은 젊음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세월과 화해하는 일이다.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생활이 단정하고,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다스릴 줄 알며, 자녀가 잘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살아갈 때 노년은 깊어진다.

 

방학마다 독일을 여행하고 지금은 장기 체류하며 이들의 일상을 지켜보기에 그 교훈은 더욱 선명하다. 노후의 맛은 검소한 식탁에서 우러나고, 노후의 멋은 자립하는 걸음에서 완성된다. 늙음은 인생의 쇠퇴가 아니라 잘 익어가는 과정이다. 잘 익은 과일이 깊은 향기를 내듯, 잘 살아낸 노년은 큰소리 없이도 주변을 따뜻하게 한다.

 

그러나 독일에 머물수록 문득 한국의 노년 풍경이 그리워진다. 이른 아침 파크골프장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툰 농담과 작은 내기 한 판으로 웃음을 나누던 친구들의 모습이다. 빠르게 확산된 우리의 파크골프 열풍은 단순한 운동 유행이 아니다. 몸을 움직이고, 친구를 만나며, 관계를 이어가는 한국 실버의 새로운 생활문화다. 독일의 실버가 자립과 절제의 멋을 보여준다면, 한국의 실버는 어울림과 정겨움의 맛을 지니고 있다.

 

어느 한쪽만이 완전한 모범은 아니다. 독일의 느림과 자립, 한국의 온기와 공동체가 서로 만날 때 더 아름다운 노년이 완성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일 제도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오늘 한 끼를 절제하고, 한 걸음을 더 걷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지 않으며, 오랜 친구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생활의 변화다.

 

노년의 품격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습관과 절제, 자립과 배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함께 웃는 시간이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내는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실버 역시 이미 충분히 선진의 길 위에 서 있다. 

 

필자의 바람은 독일 예찬을 밑천삼아 한국 실버의 자긍심까지 크게 살리는 속도와 방향 조절전략이 무척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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