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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9회 - 팔 게 없을 땐 인생이라도

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9회 - 팔 게 없을 땐 인생이라도

창원일보 | 입력 : 2026/07/2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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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첫 만남

 

안 여사가 자리를 뜨자, 테이블에는 장길녀와 나만 남았다. 낮게 드리운 실내 조명 탓에 서로의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장에서 곧게 내려온 한 줄기 빛이 와인잔 두 개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잔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반짝였고, 말없이 마주 앉아 있는 우리보다 먼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어색한 침묵을 누가 먼저 깨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처럼, 그녀는 손끝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무심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익숙한 버릇인 듯했다. 유리 표면을 따라 흐르던 빛은 부드럽게 굴절되어 잘 다듬어진 손톱 끝에서 다시 반사되었다. 갓 손질한 젤네일은 조명 아래 은은한 광택을 머금고 있었다.

 

"솔직히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보다 손톱이 먼저 말을 거는 것처럼 들렸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어요. 은행원, 기자까지 했던 사람이 왜 노점을 하나 싶어서요"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결국엔 호기심과 계층 차이를 은근히 드러내는 도발처럼 들렸다.노점상에게 `왜 노점을 하느냐` 묻는 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삼가야 할 질문이었다. 그녀는 상식이 없거나, 혹은 내 반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방책이었을지도 모른다.어쨌든 나는 그녀의 첫마디에 심사가 뒤틀렸다. 지나친 자의식인지 모르지만 그 여자의 눈빛이 초식동물의 약점을 노리고 있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끈끈한 시선을 피하며 벽에 걸린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추사 선생의 `세한도` 영인본이었지만 고급 액자에 표구되어 있어 원본의 고고한 기품이 남아 있었다. 전혀 고고하지 않은 지금의 내 처지를, 추사 선생이라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살려고요" 불쑥 생각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쿡" 그녀가 웃었다. "의외의 대답이시네요. 보통은 그렇게 말 못 하죠. 다들 변명부터 하거든요. 왜 있잖아요. 경기 탓, 사람 탓, 운이 나빴다든가… 그런 이야기들"

 

"변명해 본들 뭐가 달라집니까"

 

내 속뜻은 그렇지 않은데 계속 대답이라는 것이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오른손 검지를 와인잔 가장자리에 걸친 채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느리게 회전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 표정과 말투를 살피고, 그 관찰 위에 다음 질문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사람. 마치 점괘를 읽기 전 상대의 기운부터 들여다보는 무녀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는데… 당신은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르네요. 기자 출신이라 그런가요"

 

나는 그녀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 본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권위를 앞세우 는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그 권위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권위가 기대한 반응을 얻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분노하거나 당황하거나, 뜻밖에도 예의를 갖춘다.

 

취재 현장에서 나는 그런 순간을 포착하는 법을 배웠다. 이를테면 윈스턴 처칠의 입에서 시가를 빼앗아 찍어낸 그 유명한 사진처럼 말이다. 권위의 껍질이 벗겨지는 찰나, 비로소 한 인간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녀는 내 침묵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신 답을 내렸다.

 

"사람을 보면 알죠. 가진 건 없어도 자존심은 남은 사람. 성호 씨가 그런 사람 같네요. 요즘은 보기 드물어요"

 

나는 여전히 맞장구칠 생각이 없었다. 침묵은 때로 말보다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시쳇말로 노점상에 불과한 내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수성가한 사업가에게 해줄 말도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거의 맨주먹으로 시작해 불과 십 년 만에 규모 있는 수출기업을 일군 사람이었다. 그녀의 노골적인 질문과 내 정리되지 않은 퉁명스러운 대답만 공회전할 뿐, 시간이 갈수록 대화는 좀처럼 맞물리지 않았다.

 

문득 오늘 만남은 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그녀를 향해 곤두서 있던 내 신경도 서서히 풀렸다. 칠근이와 안 여사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에게 굳이 나쁜 인상을 남길 이유도 없었다. 마음을 정리하고나니 내 태도가 조금은 과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사란 결국 손님이 물건을 사든 말든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는 일 아닌가.

 

그때 그녀의 검지가 다시 크리스털 와인 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조명을 받은 잔 끝이 잠시 번뜩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경을 긁던 그녀의 느긋한 몸짓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역시 그녀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가 유리잔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떼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죄송해요. 첫 만남에 제가 표정이 조금 딱딱했죠. 요즘 일본 거래처에서 클레임이 계속 들어오고 있거든요. 도자기 세면대에 미세한 크랙이 생긴다는 거예요. 일본은 정말 까다롭죠. 검수도 철저하고, 환불 기준도 엄격하고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성형 공정의 시간 문제나 운송 중 충격 때문이라기보다는, 혹시 유약 조성이나 가마 내부 온도 쪽 문제가 아닐까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속이 서늘해졌다.

 

괜한 참견이었다.

 

상대는 대기업을 이끄는 사장이었고, 평생 요업을 업으로 삼아 온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시장 바닥에서 셔츠를 파는 노점상에 불과했다. 내가 감히 끼어들 분야가 아니었다.

 

그녀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아니, 전문가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예전에 `도자기 전쟁`이라는 신문 기획기사를 쓰면서 일본 사세보의 도자기 공장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었죠. 유약 조성비가 아주 조금만 달라져도 미세한 크랙이 생길 수 있다고요. 규격 검사에는 통과해도 소비자가 느끼는 완성도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야… 노점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한데요"

 

말을 마친 그녀가 금세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앗, 죄송해요. 또 실례되는 말을 했네요. 그래도 아무리 기자셨다고 해도 그런 부분까지 기억하고 계신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나는 담담히 웃었다.

 

"아닙니다. 지금의 저는 노점상이 맞으니까요. 틀린 말씀은 아니셨습니다"

 

일부러 태연한 척 말했지만, 그녀는 그 의도를 알아챈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성호 씨, 의외로 재미있는 분이네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예리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느낌이 들어요. 은행원 시절의 습관일까요? 아니면 기자였을 때의 감각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시장 바닥에서 배운 걸지도 모르죠"

 

그녀는 그런 내 표정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호 씨 같은 사람은 제 주변에 없어요"

 

잠시 말을 고른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무던해 보이는데… 속에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조금 위험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위험이라… 원래 남자라는 족속은 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괜찮은 여자 앞에서는 더 그렇고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저는 그런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겉도 속도, 안팎도 전부 빈껍데기죠"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잔을 돌렸다.

 

"그럼 저도 괜찮은 여자 축에는 들어가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호호… 성호 씨는 겉보기엔 카리스마가 없어 보여요"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시선이 내 눈을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느껴져요. 사람을 편하게 만들면서도 쉽게 속을 보여주지 않는 힘 같은 것 말이에요"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안 여사가 왜 그렇게 성호 씨를 꼭 만나 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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