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학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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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천정책포럼 이사장 |
◆35.9%라는 역대 최저 노인 빈곤율의 참담한 실상
최근 정부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이 사상 처음으로 30%대(35.9%)로 낮아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숫자만 보면 우리 사회의 고령화가 제법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화려한 지표의 뚜껑을 열어보면 참담한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국가가 주는 지원금을 빼고 어르신들이 스스로 벌어들이는 소득만 놓고 보면, 빈곤율은 여전히 54.9%에 달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노인 두 명 중 한 명은 자력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노인들이 가장 가난한 나라다. 이 지독한 가난의 숫자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자기 몸무게의 몇 배나 되는 상자를 산더미처럼 싣고 차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어르신의 `폐지 리어카`는 도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필자가 2026년 초 고향인 합천에 내려와 정착한 이후 참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곳 합천에서는 길거리에서 폐지 리어카를 끄는 어르신들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을 경로당에 가면 매일 따뜻한 점심을 함께 나누어 먹고, 군청에서 제공하는 촘촘한 복지 서비스와 소규모 텃밭 농사 덕분에 겉보기에는 농촌 어르신들의 삶이 도시보다 훨씬 윤택하고 평온해 보인다.
◆도시가스 배관망 끝자락, `에너지`와 `의료` 고립의 비극
하지만 행정당국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평온함`이나 `지표상의 안락함`이라는 통계의 함정에 빠지는 순간, 농촌의 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농촌 노인 빈곤의 진짜 아킬레스건은 따로 있다. 바로 `에너지 격차`와 `의료 고립`이다. 실제로 농촌 어르신들이 쓰는 에너지 비용 부담은 도시보다 무려 34%나 더 높다. 대도시에는 값싸고 편리한 도시가스가 구석구석 들어오지만, 배관망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골 지역은 여전히 비싼 난방유(등유)나 LPG 통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의 여름과 겨울은 대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하고 극단적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양달과 응달의 경계마저 모호해지는 혹서기가 찾아오면, 시골 아스팔트와 가옥은 거대한 가마솥처럼 달아오른다. 반대로 겨울철 칼바람이 몰아치면 도시의 빌딩 숲과는 달리 사방이 트인 농촌의 단독주택들은 말 그대로 얼음장으로 변해버린다. 누진세 무서워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한 대 맘 편히 틀지 못하는 가마솥 같은 여름,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보일러 기름통 눈금을 보며 이불 몇 겹으로 한기를 버텨내는 얼음장 같은 겨울. 이 가혹한 정주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어르신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피난처가 바로 `마을 경로당`이다.
숨이 턱 막히는 한여름의 폭염을 피해, 그리고 살을 들이치는 한겨울의 혹한을 피해 텅 빈 집을 뒤로하고 경로당에 모여 밥을 짓고 함께 계절을 나는 것은 이웃 간의 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혹한 냉ㆍ난방비를 줄이기 위한 처절한 생존 방식인 셈이다. 여기에 더해, 몸은 아픈 곳이 많은데 응급실 골든타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농촌 의료 공백`은 노인들을 생존의 절벽으로 내몰고 있다. 최근 지방 소멸지역의 고립된 노인들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며 절규하는 목소리는, 행정이 통계 바깥에 방치된 가혹한 에너지 격차와 일상화된 의료 소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다는 생생한 방증이다.
◆노인에게 평생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는 야만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최근 지자체들이 쏟아내는 `중장년 인생 2막 일자리 정책`을 보면 참 씁쓸하고 깊은 우려가 앞선다. 대다수 정책의 결론은 노인들을 어떻게든 다시 일터로 밀어 넣어서, 빈곤 문제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70세가 넘어서도 일하는 고령 취업자가 200만명을 돌파한 현실을 두고 사회는 `활기찬 고령화`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두 가지 치명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어르신들이 생계를 위해 단기 재정 일자리와 단순 노동시장에 오래 머물수록, 우리 자녀 세대인 청년들의 일자리는 그만큼 사라진다는 점이다. 둘째, 가장 본질적으로 노인들에게 평생에 걸친 육체노동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빈곤을 알아서 탈출하라는 사회는 결코 진정한 복지국가라 할 수 없다. 늙어서까지 일을 해야만 겨우 생존을 허락하는 사회는 복지사회가 아니라 야만이다. 노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끝없는 땀방울이 아니라, 은퇴 이후의 삶을 인간답게 지탱해 주는 `기본적인 생존권의 보장`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니 도시에 단기 일자가 생길 때마다 농촌으로 내려오려던 귀농ㆍ귀촌 가구 수가 연속으로 감소하는 기형적인 현상까지 나타난다. 농촌 공동체의 주역이 되어야 할 시니어들이 도시의 고단한 노동에 묶여 내려오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농촌 소멸을 더욱 가속화하는 안타까운 유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인구분산 정책`과 새로운 사회시스템으로의 대전환
따라서 이제는 노인 빈곤 문제를 땜질식 재정 투입이나 고단한 노동 강요로 해결하려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대도시에 밀집된 고령 인구를 농촌으로 자연스럽게 분산시켜 안락한 노후 복지를 제공하는 `전략적 인구분산 정책`을 시행해야 할 결정적 타이밍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산을 퍼주는 복지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대도시의 과밀과 고비용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고령층이 농촌의 넓고 쾌적한 자연환경 속으로 분산되면 어르신들은 억지 노동 없이도 안락한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이 시스템은 텅 비어가는 소멸 지역을 활성화하고, 농촌에 새로운 정주 기반을 만듦으로써 청년들이 내려와 일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까지 확보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인구 분산이라는 국가적 전략 속에서 복지와 지역 재생, 청년 고용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농어촌기본소득`은 농촌 빈곤의 패러다임을 바꿀 중대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연금 제도의 사각지대를 메우고 인구 유입의 마중물이 될 생존의 기초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나 행정당국은 단순히 세금을 `현금으로 나눠주는` 손쉬운 길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무분별한 현금성 살포는 물가를 자극해 시장 경제를 왜곡하고, 결국 청년들의 미래 일자리를 파괴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정답은 명확하다. 인구 분산 시스템과 연계된 노인 복지 예산을 청년과 농촌 장년층의 `새로운 일자리 예산`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자체의 재정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지역 내에서 소득과 복지로 순환하는 `로컬 루프(Local Loop)`를 합천에서부터 완성해야 한다.
◆`청-장-노 동행`, 지속 가능한 합천의 열쇠
그 구체적인 상생의 길은 세 갈래로 연결된다.
첫째, 인구분산 정책과 연계된 기본소득, 그리고 연금을 통해 노인의 기초적인 생존권을 온전히 보장해 주어야 한다. 어르신들이 푼돈을 벌기 위해 힘겨운 노동시장에 나서지 않고도, 쾌적한 농촌에서 명예롭고 안락한 은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작이다.
둘째, 농촌으로 분산ㆍ정착한 은퇴 시니어들을 `지역사회의 지혜로운 기여자의 역할`로 모셔야 한다. 육체적 부담은 적으면서 평생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경로당 공동취사 당번제`, `귀농 창업자를 위한 경영ㆍ기술 컨설팅`, `마을 밀착형 보건ㆍ의료 통합 돌봄 서비스` 등을 공식적인 마을 일자리로 만드는 것이다.
셋째, 고향의 청년들에게는 어르신들의 지혜와 첨단 기술을 결합하여 농촌의 오랜 숙제를 해결하는 `기획 오퍼레이터(Operator)`의 역할을 주는 것이다. 우리 농촌의 가장 큰 슬픔인 도시가스 미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단위의 재생에너지 솔루션을 기획하고, 통계 바깥에 방치된 독거노인들의 고립을 막기 위해 데이터를 활용한 스마트 돌봄 안전망을 청년들이 직접 구축하고 관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복지 예산이 청년과 장년의 일자리로 흐르고, 그 청ㆍ장년들이 전략적으로 분산ㆍ이주해 온 노년의 삶과 건강을 자식처럼 돌보는 상생의 구조, 이 `청-장-노 동행(靑-壯-老 同行)`이야말로 재정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노인의 생존권과 농촌의 미래를 모두 구하는 확실한 해법이다.
길거리에 폐지 리어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농촌 노인들의 정주 환경과 삶 자체가 온전히 안전한 상태인 것은 결코 아니다. 대도시에 비해 외견상 경제적 여유와 일상의 윤택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도시가스 배관망의 끝자락에서 발생하는 잔인한 에너지 격차, 무너진 의료 안전망, 그리고 통계 바깥에 방치된 외로움의 깊이를 우리 행정당국은 이제 엄중하게 살펴야 한다. 무분별하게 현금을 살포하거나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는 손쉬운 길 대신, 국가적 인구 분산이라는 거시적 안목 위에서 세 세대가 함께 일터와 생명선을 지키며 동행하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우리 합천에서부터 먼저 단단하게 연결해 나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