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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10회 - 동백을 닮은 여인

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10회 - 동백을 닮은 여인

창원일보 | 입력 : 2026/07/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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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그녀의 진홍빛 루주가 발린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동백꽃 한 송이가 조용히 말을 거는 듯했다. 차가운 해풍을 견디며 겨울 끝자락까지 붉은 꽃잎을 놓지 않는 동백. 화려하기보다 강인한 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안 여사가 이 자리를 만든 건… 어쩌면 나보다 당신이 더 걱정됐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말끝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하지만…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코트를 걸친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차창을 타고 흘러가는 도심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만남의 의미를 곱씹었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

 

한때 내 손에 닿을 듯했다가 어느새 멀어져 버린 자리. 장길녀는 어쩌면 그 세계로 내가 다시 들어갈 수 있는 키 우먼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나는 연정을 느낄 수 없었다. 내게 그녀는 한 사람의 여인이라기보다 `돈`과 `명예`라는 두 글자가 잠시 사람의 모습을 빌려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택시는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췄다. 차창 밖 네온사인이 물결처럼 번져 갔다.

 

그 불빛 사이로 최근 나를 스쳐 지나간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왕비다방의 영숙 씨. 코스 아주머니 말숙 씨. 그리고 밀양 오일장 가던 길, 내 승용차 창가를 향해 말없이 손을 흔들던 흰 코트의 여자. 웃음소리와 향수 냄새,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몸짓까지도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영숙 씨에게는 악어 형님이 있었고, 말숙 씨에게는 칠근이가 있었다.

 

밀양 길에서 만난 그 여자와는 연락처조차 나누지 못했다. 그녀와 생김이 비슷한 이가 내가 밀양 장사를 빠지는 날마다 두세 번 찾아왔었다는 식당 주인여자의 전언만 들었을 뿐이었다.

 

오늘 만난 장길녀라는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분명한 실체였다. 냉정했고, 정확했다.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된 수순처럼 흘러갔고, 감정은 좀처럼 얼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 결국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다`

 

나는 도바 위에서 물건을 팔았고, 그녀는 기업에서 상품을 팔았다.

 

다를 것은 규모뿐이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그녀는 그 대가로 돈과 명예의 일부만 내게 건네면 된다. 거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칠근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정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이라 생각해라. 몇 년 뒤 위자료는 내가 충분히 챙겨줄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가"

 

처음 들었을 때는 비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현실처럼 들렸다. 칠근의 말에는 생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거창한 철학은 없었다. 대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계산이 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마음이 가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감정에 기대면 상처가 남지만, 조건에 기대면 손익만 남는다.

 

적어도 그 편이 덜 아플지도 모른다.

 

이틀 뒤, 안 여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성호 씨, 이번 주말 저녁에 장길녀 대표님이 시간을 내시겠대요. 송도에 그 분 별장이 하나 있거든요. 댁으로 차를 보내 주신다네요"

 

`별장`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렸다.

 

"이번 자리는 지난번과 달라요. 이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차례예요"

 

`이야기` 그 말을 듣는 순간, 엉뚱하게도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룻밤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밤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던 셰에라자드.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목숨 대신 몇 푼의 돈과 알량한 명예를 얻기 위해, 낮의 언어가 아니라 밤의 언어를 준비하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셰에라자드와 닮아 있었다.

 

장길녀가 보내온 승용차가 송도 해안가로 접어들 무렵, 바다는 이미 기울어가는 해를 품고 있었다.

 

남쪽 바다에서 밀려온 바람이 짭조름한 소금기와 젖은 미역 냄새를 품은 채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고갈산 긴 자락이 바다 건너편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고갈산 해안 절벽 허리를 따라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들은 마치 산이 사람들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산을 붙잡고 겨우 버티는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붉게 칠해진 지붕은 바닷바람을 견디며 녹슨 철판처럼 빛이 바랬고, 기울어 가는 햇살이 그 위를 천천히 훑으며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골목마다 노을이 고여 있었다. 그 붉은 빛은 집들을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세월을 조용히 덧칠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동안 건너편 이송도와 조용히 파도치는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가 먼저 나를 알아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오래된 바다를 다시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오래 묻어 두었던 추억 하나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직장 초년생 시절이었다.

 

그 무렵, 주말이면 나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먼지 냄새 밴 책 표지를 손끝으로 훑다가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을 찾을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그것만으로도 넉넉했다.

 

책을 들고 버스에 오르면 목적지는 늘 송도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오래된 일본식 여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방 안에는 다다미 냄새가 먼저 반겨 주었고, 창문을 열면 바다가 아무 말 없이 방 안까지 밀려들었다.

 

나는 시집을 몇 줄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고, 다시 책장을 넘기다가 또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시는 내 손안에 있었지만, 그날의 나는 시보다 바다를 더 많이 읽고 있었다.

 

다다미 위로 번져 오던 노을은 어느새 발끝까지 스며들었고, 제2송도 절벽 아래 슬레이트 지붕들도 붉은빛 속으로 천천히 잠겨 갔다.

 

방 안과 바깥의 경계도, 현실과 꿈의 경계도 그 시간만큼은 희미해졌다.

 

창틀에 팔을 괸 채 나는 그 마을과 함께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 당시, 절벽에 매달린 집들이 서로를 떠받치며 버티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은행원이라는 삶을 겨우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외롭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시간이 아니라, 비로소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사람들 속에서는 내가 희미해졌지만, 바다 앞에서는 오히려 내가 또렷해졌다.

 

고독은 상처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를 숨겨 둘 수 있는 작은 방이었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조용한 피난처였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잠기면 풍경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나 또한 그 풍경의 일부가 되곤 했다.

 

그 무렵의 나는 세상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진심은 언젠가 반드시 길을 찾아낸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믿음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순진함 하나로 가장 힘겨운 청춘을 건너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송도의 바람은 내게 단순한 바닷바람이 아니었다.

 

세상에 찌들기 전, 아직 돈보다 시를 믿고, 성공보다 사람을 믿던 마지막 바람이었다.

 

창밖으로 언덕 위 별장의 일찍 켜진 불빛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날, 시집 한 권을 품고 찾아오던 송도.

 

오늘은 돈과 명예를 품고 찾아왔다. 바다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변해 버린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나였다. 나를 실은 검정색 체어맨은 조용히 언덕길을 올라 바리케이드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 별장 정문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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