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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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흰색 2층 저택이 나타났다. 바로 아래가 송도 해변의 끝자락이었다. 저택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작은 골프 연습장, 풀장까지 갖춘 별장 건물이었다.
2층 창밖으로는 바다가 눈앞에 정면으로 펼쳐져 있었다. 갈매기 울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다. 바다 위에는 낚싯배 몇 척이 정지한 채 점처럼 떠 있었다.
장길녀 대표는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니트 차림, 젊게 보이려고 짙은 화장을 한 듯 했지만 마흔 중반이라는 세월을 감출 수가 없어 보였다. 테이블에는 크리스털 잔 두 개와 브랜디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무료했던 이 사람을 이렇게 불쑥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갑작스런 초청에 장난과 힐난을 적당히 버무린 인사로 대신했다.
"이 자리는 불쑥이 아니에요. 안 여사가 나름 많이 신경 썼어요. 물론 저도 그랬고요" 그녀가 나폴레옹 꼬냑을 두 잔 따라 한 잔을 내 앞에 건넸다.
"와인은 잘 안 해요. 와인은 말이 길어지셔요" "지난번 클레임 사건이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날 성호씨 말이 단순한 조언은 아니었어요. 성호씨는 계산보다 감으로 사람을 보는 것 같아요. 그게…또 묘하게 믿음이 가거든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이브닝드레스를 걸친 중년의 여자 몸에서 은은한 향이 났다. 내 옆에 앉아 브랜디를 따르며 말했다.
"당신은 순수하죠. 그게 장점이자 결점이에요"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스치듯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그 짧은 접촉에 나는 괜히 몸이 움찔 굳어버렸고, 그녀는 나의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책망하듯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요. 내가 어색해지잖아요" 지나치게 예민했던 내 촌스러운 반응에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보통 남자들은 이런 상황이면 말이 달라지죠. 근데 당신은…오히려 더 조용해지네요" 나는 억지로 웃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제일 강한 반응이에요" 그녀가 잔을 들어 올렸다.
"성호씨, 난 사람을 오래 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속은 유리처럼 잘 깨어지죠. 제가 만드는 도기 제품들도 마찬가지예요. 겉보기에 강해 보여도 잘 깨지는 것이 태반이죠. 하지만 강한 불을 이겨낸 것들은 잘 안 깨어지죠" 멀리 바다 위로 해안초소 감시 서치라이트가 한 바퀴씩 천천히 돌며 수면을 쓸고 있었다. 그 불빛이 바다 위를 감았다가 풀어내며, 잠깐씩 파도 끝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우리 만남은 확실히 거래예요. 내 사업에도, 내 인생에도,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죠. 언론 쪽에도 연결이 있고, 은행에도 줄이 있는 사람.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어요" 그녀는 덧붙였다.
"그럼에도…"그녀가 한 발 더 내게로 다가왔다.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죠. 거래에서 감정이 생길는지는"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등을 덮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 순간, 내 몸이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으나 그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해해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닫았다.
"성호씨 난 사람의 욕망보다 절제를 더 믿어요. 욕망은 누구나 있어요. 절제는 선택이에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절제가 내겐 필요해요" 그녀의 말이 끝났다. 그녀는 웃었다.
"성호씨의 절제된 모습은 제가 호감 느끼는 이성에게서 바라던 바 그대로예요" 그녀가 다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여기는 내가 제일 힘들 때 살았던 곳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서른 살, 아무것도 없던 시절 바로 이 근처에 공장을 짓고, 컨테이너 하나 세워놓고 사무실로 썼어요. 입구 군사지역 출입금지 바리케이드 있던 그곳이 그때는 공장이었어요. 그때 이 바다를 보며 다짐했죠. 이 바다처럼 지치지 말고 앞으로 멀리 나가자고. 그 후, 내겐 많은 시련들이 있었지만 결국 이겨냈죠. 십여 년 만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으로 키웠고, 우리 회사 제품들이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으로 수출되고 있죠"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검은 바다 건너편, 영도 제2 송도의 경사진 해안 길 위로 작은 불빛을 단 차량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 그 불빛이 밤의 수평선 위에 선을 그리듯 미끄러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꺼져버렸다. 아마도 목장원 쪽 산허리를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 채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계신 저 바다 건너편도, 예전엔 내가 자주 다니던 길이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 힘든시절의 회상이 담겨 있었다.
"서른 무렵이었죠…매일 하루 세 끼 라면으로 버티던 시절이었어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잔을 들고 있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브랜디의 호박빛이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가, 이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그녀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술잔을 비우는 속도만큼,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이 위로 치솟아 오르는 듯했다. 술이 그녀를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기억이 그녀를 취하게 하고 있었다.
"그땐 다들 나를 `여자 사기꾼`이라 불렀어요. 납품 대금 떼먹을까 봐, 물건 맡기는 사람도 없었죠. 결국 직접 트럭 몰고 다니며 납품했어요. 거래처 돌다 보면 저기 바라보이는 이송도 저 길을 꼭 지나쳤어요. 태종대 못 미쳐, 영도 해양대학교 앞 하리라는 어촌 마을에 큰 거래처가 있었죠. 내가 직접 만든 타일을 납품하던 곳이에요. 그 시절엔 가마 불을 한 번 끄면 다시 올리는 데 반나절이 걸렸죠. 불을 꺼두면 타일에 금이 가거나 색이 달라지니까 밤새 작업장을 지키며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애썼어요. 겨울엔 새벽쯤 되면 손끝이 얼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지만 그래도 가마 속 불빛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어요. 그때 저 등대가 나의 친구였죠…그때는 무섭지도 않았어요.
돈이 없고, 백이 없고, 몸 하나뿐이니까 잃을 것도 없었죠. 그런데 이상하죠. 가진 게 많아질수록 겁이 많아지더라고요. 특히 사람을 믿는 게 제일 어려워졌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엔 단단한 힘이 남아 있었지만, 그 단단함은 이제 힘이라기보다 오래된 외로움의 껍질처럼 보였다. 그날 밤의 송도 바다는 파도도 없이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꼭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깊이 잠긴 파도처럼, 숨죽인 무언가가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