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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김 칼럼]
실버의 재개발과 재건축

늙음을 견디게 하는 나라와, 늙음을 살아가게 하는 나라

[잉글랜드김 칼럼]
실버의 재개발과 재건축

늙음을 견디게 하는 나라와, 늙음을 살아가게 하는 나라

창원일보 | 입력 : 2026/08/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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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국(대구가톨릭대 창업경영학과 교수 / 논설위원 / Saxophonist / 교육부ㆍ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상)    

독일의 거리에서 만나는 노년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과 조금 다르다. 은빛 머리의 노인이 혼자 장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카페 한쪽에 앉아 책을 읽는다. 지팡이를 짚었지만 주눅 들지 않고, 걸음은 느려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젊음의 화려함 대신 오래 살아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평온과 품격이 배어 있다.

 

독일의 노년이 특별한 것은 노인이 많아서가 아니다.

 

늙은 사람이 늙은 모습 그대로 사회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고, 몸이 불편해졌다고 자기결정권까지 빼앗기지 않는다. 도움은 받되 존엄을 잃지 않고, 보호받되 자기 삶의 주인 자리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한국의 노후는 이와 사뭇 다르다. 우리는 부모 세대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노년을 너무 쉽게 가족의 부담이나 복지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은퇴하는 순간 직함과 역할이 함께 사라지고, 자녀가 독립하면 삶의 중심마저 흔들린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무엇을 위해 남은 시간을 살아갈 것인가는 오롯이 개인의 숙제로 남는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처럼 여기며 살았다.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때로는 자신의 노후 자금까지 기꺼이 내어주었다. 정작 자신의 노년을 위한 시간과 관계, 취미와 꿈은 뒤로 미뤘다. 그렇게 책임을 다하고 맞이한 은퇴 뒤에는 뜻밖에도 깊은 공허가 기다린다.

 

독일의 실버들은 자녀를 사랑하지만 자녀의 인생에 자신의 노후를 맡기지는 않는다. 함께 식사하고 손주를 돌보더라도 서로 삶의 경계를 존중한다. 자녀는 부모의 노후를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며, 부모 역시 자녀의 삶을 붙잡아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 않는다. 그 거리는 냉정함이 아니라 독립을 인정하는 또 다른 사랑의 방식이다.

 

한국의 부모에게 자녀는 여전히 마지막 보루인 경우가 많다. 자녀가 자주 찾아오면 행복하고 연락이 뜸하면 서운함을 넘어 버림받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자녀 또한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과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죄책감을 짊어진다. 사랑이 의무가 되고 효도가 부담이 되는 순간, 부모와 자식 모두 지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노후의 재개발이다.

 

낡은 건물을 부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부모와 자식, 노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설계하자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삶의 전부를 되찾으려 하지 말고, 자녀는 부모를 단순한 부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되 의존하지 않고, 돕되 지배하지 않으며, 가까이하되 서로의 인생을 인정하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노후의 재건축이 필요하다.

 

은퇴 뒤의 삶에 새로운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직장이 사라졌다고 존재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명함에서 직함이 지워졌다고 인생의 이름까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자녀가 떠났다고 부모의 삶이 끝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배움을 다시 시작하고, 오래 미뤄둔 취미를 꺼내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경험을 사회에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노년의 경험은 퇴물이 아니라 한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한 귀중한 자산이다.

 

독일의 실버들은 은퇴 뒤에도 지역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봉사와 취미 모임, 평생교육과 문화활동 등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그들에게 활동은 젊음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삶과 계속 연결되기 위한 일상이다.

 

반면 한국의 노년은 아직도 `일 아니면 고립`이라는 좁은 선택지에 놓이기 쉽다. 생계를 위해 다시 노동시장으로 나가거나 집과 경로당 사이에서 긴 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평생 쌓은 지식과 기술, 지혜와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할 통로도 충분하지 않다. 한 사람의 수십 년 경험이 은퇴와 동시에 사장되는 것은 개인의 손실을 넘어 국가적 낭비다.

 

우리는 노후 준비를 지나치게 돈의 문제로만 생각해 왔다. 연금과 집, 예금과 보험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통장에 돈이 있어도 만날 사람이 없다면 삶은 외롭다. 몸이 건강해도 내일 나를 기다리는 일이 없다면 하루는 길다.

 

노후를 지탱하는 진짜 자산은 돈만이 아니다. 사람과 관계, 할 일과 역할, 배움과 자존감도 노후의 소중한 연금이다.

 

독일 실버의 모습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까닭도 그들의 삶이 특별히 화려해서가 아니다. 늙은 사람이 자기 속도로 걸어도 사회가 재촉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해도 수치스럽지 않으며, 혼자 산다고 해서 버려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적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년은 오랫동안 가족의 희생으로 지탱되어 왔다. 이제는 가족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의 설계로 노년을 지탱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지급하는 복지를 넘어 배우고, 만나고, 움직이고, 일하고, 봉사하며 참여할 수 있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노인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데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의 주체로 대우해야 한다.

 

우리 부모 세대는 국가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너무 많이 뒤로 미뤘다. 이제 남은 세월마저 자녀 걱정과 생활비 불안, 질병과 외로움 속에서 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살아온 희생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년에도 자기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잘 늙는다는 것은 젊음을 붙잡는 일이 아니다.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홀로 모든 고통을 참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도움은 당당하게 받고,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하며, 남은 시간을 끝까지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독일의 실버는 우리에게 묻는다. 노년을 견뎌야 하는 시간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다시 살아가는 시간으로 만들 것인가.

 

노후의 재개발은 낡은 집을 허무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삶에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다. 노후의 재건축은 지나간 젊음을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남은 생을 지탱할 존엄과 관계, 역할이라는 새로운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란 노인이 특별히 강한 사회가 아니다. 늙고 병들고 걸음이 느려져도 혼자가 되지 않도록 서로의 삶을 받쳐주는 사회다.

 

한국의 실버에게도 이제 그런 노후가 필요하다.

 

실버세대의 한 사람인 필자의 바람 또한 거창하지 않다. 오래 사는 축복을 넘어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답게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의 끝에서 나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한평생 `나무 심는 마음`과 `씨 뿌려 거두는 농심(農心)`의 섭리를 몸으로 실천하며 백세의 길을 천천히, 묵묵히 걸어가시는 필자의 아버지다. 세월이 흘러 허리는 굽고 걸음은 느려졌어도 오늘도 흙을 만지고 나무 한 그루를 심으신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일을 믿는 일이다. 자신이 그 그늘을 모두 누리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아래에서 쉬어가리라는 믿음으로 땅을 파고 씨앗을 묻는 일이다. 노후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었다고 삶의 씨앗까지 거두어들일 필요는 없다. 여든에도 꿈 하나를 심고, 아흔에도 사람 하나를 품으며, 백세에도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사회라면 늙음은 더 이상 쇠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성숙일 것이다.

 

백세의 길에서도 오늘 심을 나무 한 그루가 있는 삶.

 

나는 오늘도 묵묵히 나무를 심으시는 아버지의 발자국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걷고 싶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노후의 재개발이고, 우리 사회가 함께 지어야 할 노후의 재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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