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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14회 - 떠밀리는 사람들

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14회 - 떠밀리는 사람들

창원일보 | 입력 : 2026/08/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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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가짜 쥐약 장사를 끝낸 어느 날 밤, 양 사장과 자갈치 공동어시장 골목 끝 허름한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낮 동안 그토록 시끄럽던 자갈치도 밤이 깊어가자 조금씩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천막 끝에서는 빗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뚝뚝 떨어졌다. 탁자 위에는 오래된 양은 술 주전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란빛은 거의 벗겨져 허여멀건했고, 여기저기 찌그러진 몸통은 오랜 세우러 손을 탄 흔적이 배어 있었다.

 

양 사장은 말없이 내 잔에 술을 따랐다.

 

낮에는 그렇게 떠들고 웃던 사람이었는데, 술잔을 앞에 둔 그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한동안 술만 마시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한 사장, 인생이란 게 말이다… 바다 위에 던져놓은 부표 같더라"

 

"부표요?"

 

"그래. 떠 있기는 하는데 지가 가고 싶은 데로는 못 가는 거라. 물결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밀려다니는 거지"

 

그의 메마른 손이 내 잔에 술을 부었다.

 

"나도 한때는 꿈이 있었어. 젊었을 적 외항선 타고 세상 구경 좀 했지. 항구마다 불빛도 다르고 술맛도 다르고, 사람 사는 모양도 다르더라고"

 

그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희한한 게 하나 있더라. 못사는 나라나 잘사는 나라나 사창가 아가씨 하룻밤 꽃값이 대충 구두 한 켤레 값이더라고"

 

"그걸 세계 돌아다니면서 연구했습니까?"

 

내가 웃으며 묻자 그도 따라 웃었다.

 

"연구는 무슨 연구. 젊은 놈이 배 타고 외국 나가면 뻔한 거 아니가"

 

우리 둘은 한동안 웃었다. 그러다 양 사장이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빈 잔을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때는 말이다. 세상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다고 내가 세상을 제법 아는 줄 알았어. 돈이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알고, 남녀가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는지도 안다고 생각했지"

 

그는 빈 잔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돌렸다.

 

"근데 세상 이치를 백날 알면 뭐 하나. 막상 내 집 하나도 못 지켰는데"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양 사장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성냥불이 잠깐 그의 얼굴을 밝혔다가 사라졌다.

 

"배 타고 몇 달 만에 집에 들어왔더니 말이다…"

 

그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아내가 없더라고"

 

나는 들고 있던 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젖먹이 애만 본가에 맡겨놓고 집을 나가버린 거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처럼 말했지만, 말끝이 흐려져 있었다.

 

"그때부터였지. 내 길이 없어진 게. 구덕야구장 앞에서 오징어도 팔고, 부영극장 앞에서 암표도 팔고…. 사람 많이 모인다는 데는 다 따라다녔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세월 따라 흘러 다니다 보니 지금은 자갈치 천막 밑에서 쥐틀 팔고 앉아 있네"

 

그가 눅눅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허허롭게 웃었다.

 

낮에 사람들을 웃기며 돈을 받아내던 그 웃음과는 전혀 달랐다. 웃음 끝에 서늘한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웃기지 않나, 한 사장?"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살면서 제집도 짓고 돌아갈 자리도 만들고 하는데, 내 인생은 그냥 사람들 발자국 소리만 쫓아다닌 거라"

 

그가 빈 잔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어디가 내 자리인지 나도 모르겠더라"

 

그 순간 나는 낮에 보았던 양 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발끝으로 스위치를 누르고, 능청스러운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을 웃기고,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던 사람.

 

나는 그저 세상 재미있게 사는 장사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돌아갈 곳을 잃은 한 남자의 긴 세월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그가 팔고 있었던 것은 쥐틀이나 쥐약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살기 위해 웃고, 살기 위해 떠들고, 살기 위해 이 장터 저 장터를 떠돌아야 했던 자기 자신의 세월인지도 몰랐다.

 

포장마차를 나서자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고인 빗물 위로 자갈치의 네온사인이 일그러져 흔들렸다. 멀리 선창에서는 늦게 들어온 배의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인생이 부표 같다…"

 

양 사장의 말이 차가운 바닷바람보다 깊숙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물결에 떠밀리고 바람에 밀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어느 날 돌아갈 곳조차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나라고 양 사장과 얼마나 다른가.

 

은행을 그만두고 국제시장으로 흘러들었고, 다시 자갈치까지 밀려왔다. 도바 위에서는 제법 장사꾼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내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집이라는 것이 꼭 지붕과 벽을 가진 건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내가 돌아갈 자리. 내가 붙들고 살아갈 사람. 그리고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다시 걸어가야 할 방향. 그 어느 것도 내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표처럼 떠밀려가기는 싫다. 내 닻은 내가 내려야 한다`

 

하지만 닻을 어디에 내려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도바 위에서 아무리 물건을 잘 팔아도 이것이 내가 평생 살아갈 길은 아니었다. 젊은 날을 노점이라는 길 위에서 끝없이 흘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자 다시 장길녀 회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이 떠돌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남이 거듭되어도 관계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이상하게 몸부터 굳었다.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설수록 긴장은 심해졌고,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마음까지 움츠러들었다.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불안은 더 커졌다.

 

이대로라면 장길녀와의 관계도, 그녀를 통해 꿈꾸었던 새로운 생활도 모두 놓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장길녀라는 여자일까.

 

아니면 그녀가 열어줄지도 모르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일까.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왕비다방 마담 영숙이었다. 장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이상하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길녀 앞에서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영숙과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웃으면 웃었고, 화가 나면 화를 냈다. 어쩌면 내가 장길녀에게 끝내 한 발 더 다가가지 못하는 데에는 영숙에 대한 마음도 끼어 있는지 몰랐다.

 

그렇다고 영숙에게로 갈 수도 없었다. 영숙을 좋아하는 마음과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장길녀를 붙잡아야 하는지, 영숙에게 마음이 가는 대로 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사람 모두에게서 물러나 내 길부터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칠근이는 그런 나를 몇 번이나 다그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게 두 손을 들었다.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기라. 나는 인자부터 니 청춘사업에 간섭 안할테니 니 쪼대로 해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그친 골목 끝에서 문득 바다를 돌아보았다. 바다는 검었다. 멀리 희미한 불빛 아래 부표 하나가 파도를 따라 힘겹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 사장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인생이란 게 바다 위에 던져진 부표 같더라`

 

나는 한동안 바다 위 부표를 바라보았다.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완전히 떠내려가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다 속 어딘가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양 사장에게도 한때 그런 닻이 있었을까. 아내였을까. 젖먹이 아이였을까. 아니면 젊은 날 품었던 어떤 꿈이었을까. 그 닻줄이 끊어진 뒤부터 그는 사람 많은 곳만 찾아 평생을 떠돌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장길녀인가. 영숙인가. 아니면 아직 만나지 못한 어떤 삶인가.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젖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니 부표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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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쏭 2026/08/27 [12:31] 수정 | 삭제
  • 인생이란 게 바다 위에 던져진 부표 같더라 인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