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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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
양 사장의 성대결절은 놀랄 만큼 빨리 나았다. 병원에서는 당분간 목을 아끼라고 했다는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목소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말을 할 때마다 목 안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섞였지만, 하루가 다르게 본래 목소리를 되찾았다.
장사꾼에게 목소리는 밥줄이었다. 특히 양 사장처럼 말로 사람을 끌어모으고, 웃음으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손발 하나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이 나은 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도바 앞에 섰다.
"자아, 쥐 때문에 밤잠 설치는 사람들 다 이리 오이소!"
골목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웃음이 났다. 내가 처음 만났던 그 양 사장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장사를 마치고 우리는 천막 뒤에 쪼그리고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양 사장은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잔을 자주 비웠다. 그러다 불쑥 말했다.
"아우님" "예" "별다른 계획 없으면 이대로 나하고 같이 해보자"
나는 막걸리 잔을 든 채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이 손발도 잘 맞고 장사도 술술 풀리잖아. 니가 앞에서 사람 끌어모으고 내가 뒤에서 받쳐주면 못할 게 뭐 있겠노. 돈 문제는 섭섭하지 않게 해줄게"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동안 양 사장은 나를 단순한 일꾼으로 대하지 않았다. 장사가 끝나면 술을 샀고,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때로는 오래 알고 지낸 동생처럼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고맙습니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저는 이쯤에서 그만두려고요" 양 사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그냥요" "그냥이 어디 있노. 돈이 작아서 그러나?" "아닙니다. 돈은 충분합니다" "그럼?"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은행을 그만둘 때도 그랬다.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한 직장이었고, 조금만 참고 견디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국제시장으로 흘러들어와 도바를 펴고 장사를 할 때는 세상에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 붙들고 있으려 하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양 사장과 하는 장사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었다. 돈도 됐다. 사람도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오히려 형님이 너무 잘해주시니까 걱정입니다"
"뭐가?" "이대로 있다가는 미련이 생겨 못 떠날 것 같아서요"
양 사장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걸리 한 잔이 단숨에 그의 목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술잔을 놓으며 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니 참 희한한 놈이다. 사람들은 이 장마철에 안 붙잡을까 걱정인데, 니는 잘되는 장사 놔두고 갈 데도 없이 나가겠다 카네"
나도 웃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양 사장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잠시 뒤 내 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르며 말했다.
"그래. 아우 마음 알겠다" 그는 자기 잔에도 술을 따랐다.
"사람이 떠나고 싶을 때는 떠나야 되는 기다. 억지로 붙잡아놔 봐야 몸만 여기 있지 마음은 벌써 딴 데 가 있는 법이거든"
말이 뜻밖이었다. 며칠 전 포장마차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사람 많은 곳을 찾아 평생을 떠돌았다는 사람. 그런 그가 내게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라" "뭡니까?"
"시간 날 때면 종종 술 한잔 하러 온나" 양 사장이 잔을 내밀었다.
"나는 이상하게 니하고 마시는 막걸리가 맛있더라" 서로의 잔이 부딪쳤다. 짤랑.
헤어지기 직전 양 사장은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라" "뭡니까?" "니 품삯이지 뭐겠노"
봉투를 열어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돈을 세어보니 백이십만 원이었다. 처음 약속했던 일주일치 수당의 두 배였다.
"형님, 이건 너무 많습니다"
나는 돈 일부를 꺼내 돌려주려 했다. 양 사장이 내 손을 밀었다.
"됐다" "그래도 이건…"
"사내새끼가 돈 가지고 자꾸 실랑이할래?"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 덕분에 내가 목 고치는 동안 장사 안 접고 잘 버텼다. 니가 사람 끌어 모아서 번 돈이 얼만데. 내가 계산 다 하고 주는 기다"
그래도 머뭇거리자 양 사장이 봉투를 내 가슴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장사꾼이 돈 줄 때는 이유가 있는 기다. 받아라"
나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양 사장은 대답 대신 잔을 들었다.
그날 우리는 막걸리 한 병을 더 비웠다. 헤어져 몇 걸음 가다가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양 사장은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낮이면 사람들을 웃기고, 쥐틀을 팔고, 저녁이면 술 한잔으로 하루를 접는 사람.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며칠 전 들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인생이 부표 같다는 말. 나는 그 곁을 떠나면서도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나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주머니 속에는 뜻밖의 돈이 들어 있었다. 백이십만 원. 당분간 장마를 견디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갈 곳은 없지만 당장 먹고살 걱정은 사라졌다. 그것도 묘한 일이었다.
나는 봉투를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자갈치 골목을 빠져나왔다. 비 냄새가 묻은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이튿날 저녁, 나는 용두산 아래 포장마차 중동집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돈이 생겼다고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마 때문에 며칠째 제대로 장사를 못 했고,그렇다고 일찍 방으로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중동집은 그런 날이면 습관처럼 찾아가는 곳이었다. 천막을 걷고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눈부터 흘겼다.
"아이고, 우리 한 사장님 오셨네. 오늘은 외상 장부에 한 줄 더 그으러 왔나?" "아지매, 오늘은 장부 없애러 왔습니다" "뭐라꼬?"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동안 밀린 거 전부 계산해주이소"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 어디서 양놈 지갑 주웠나?"
"양놈 지갑은 아니라도 인심 좋은 사람이 지갑 째 주긴 하더만요"
"요새도 그런 얼빠진 양반이 있던 모양이네"
아주머니가 깔깔 웃었다. 밀린 외상값을 모두 치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돈이 없을 때는 외상 한 줄도 빚처럼 등에 붙어 다녔다. 장사꾼에게 외상이란 단순히 술값 몇 푼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벌어 오늘 먹고사는 사람에게 밀린 술값은 어제의 궁색함이 오늘까지 따라온 흔적 같은 것이었다.
"오늘은 외상 아니니까 좀 좋은 걸로 주이소"
"돈 냈다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네"
잠시 뒤 소주 한 병과 조개구이가 먼저 나왔다.
나는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허리춤에서 삐삐가 울렸다.
삐삐를 꺼내 번호를 확인했다. 대팔이었다. 대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도 가기 전에 대팔이 받았다.
"성호가?" "그래. 왜 찾았노?" "니 지금 어디 있노?" "중동집" "잘됐다. 니 찾는 사람이 왔다" "나를?" "그래" "누가?"
대팔이 잠깐 뜸을 들였다.
"여자다" "여자?"
"젊은 여자" "야, 여자면 이름을 물어봐야지. 젊은 여자가 뭐꼬"
"이름 물어봤지. 근데 니한테 직접 이야기하겠단다"
"내가 아는 사람이가?"
"그것도 모르겠다" "갑자기 뭔 소리고?"
대팔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여자 말로는 니는 자기를 잘 모를 거라더라" "니 지금 술 묵었나?" "안 묵었다" "그런데 와 말을 그따위로 하노" "내가 뭐 우짜라고.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대팔이 킥킥거렸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근데 성호야" "왜?"
"억수로 예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진짜라니까. 얼굴이 말쑥 씨보다도 더 예쁘다"
"니 여기서 말쑥 씨가 왜 나오노?"
"말숙씨 예쁘다 아이가?" 나는 웃음이 터졌다.
"고마 됐다. 중동집 위치나 가르쳐줘라" "니가 왕비다방으로 오면 안되겠나?" "대팔이 니가 구경하려고?" "눈치 하나는 귀신이네""씰데 없는 소리 말고 고마 끊어라"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술맛이 갑자기 달라졌다. 나를 찾아온 젊은 여자라.
그것도 나는 잘 모를 거라는 여자. 장길녀일 리는 없었다. 대팔이도 장길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나는 잔에 남은 술을 마셨다.
천막 밖으로 빗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젖은 발소리가 들렸고, 간혹 천막이 들썩였다. 별것 아닌 일인데 자꾸 입구 쪽으로 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