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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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참사랑 봉사회 회장 |
미국은 당시 일본제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ㆍ필리핀ㆍ대만ㆍ소련ㆍ극동 지역을 강제 침략하는 만행을 더이상 볼 수가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5년 5월 10일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엄선된 과학자들과 군ㆍ고위 인사들이 모여 일본에 원자탄(原子彈) 투하에 대한 비밀회동을 가졌다.
독일은 연합군의 협동적인 작전으로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결국 나치는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도쿄등 주요도시가 그의 폐허가 됐는데도 항복을 하지 않았다.
미국은 1944년 일본이 항복하기 1년전부터 `원자폭탄(原子爆彈)에 대한 파괴력을 일본 어느 도시가 가장 효과적일까?` 하는 밀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그것은 1941년 12월 공휴일 새벽을 틈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미해군기지를 기습으로 공격해 항공모함이 불타고 2,000여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등 4,000여명의 사상자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도쿄 지역 일본왕궁(日本王宮)을 목표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당시 도쿄는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됐기 때문에 일부에서 반론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일본의 옛 수도였던 인구 100만의 교토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무산되고 다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결정이 된 것이다.
4개 도시 중 8월 3일 이후 육안으로 보이는 기상 상태가 되는 곳부터 원폭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아 8월 6일은 히로시마에 TNT 2만톤 규모의 원자탄을 투하해 순식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그로 인해 일본군 2만여명을 포함해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 등 33여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원폭피해를 입었다.
미군이 노린 일본군 제2사령부와 수백 개의 병영 및 무기공장ㆍ각종 병참시설들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래도 일본은 손을 들지 하지않아 미국은 9일날 또다시 나가사키에 원폭 한 발을 투하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징용자 4만여명도 함께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쉽게 항복을 하지않아 미국은 원자탄이 없는데도 이번엔 일본왕궁을 폭파하겠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원자탄 두발을 모두 투하하고 없는데 또다시 투하하겠다는 미국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설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천황은 더이상 버틸수가 없었는지 1945년 8월 15일 정오를 기점으로 대동아 전쟁 종결에 관한 800자 분량의 항복 조서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에게도 광복이 찾아온 것이다.
이날은 일제가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긴 날로 시작한다면 40여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 사슬에서 풀러나게 된 날이다.
광복절 노래 구절 중 `바닷물도 춤을 춘다` 뿐만 아니라 `40년 뜨거운 피가 엉긴 자취`임이 자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 투하로 광복은 이뤄졌지만 3년 뒤에 남북분단이라는 슬픈 날이기도 하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 것이다.
당시 히로히토는 일본 왕실이 대대로 간직해 온 3종의 신기(神器ㆍ조상이 전해준 칼과 굽은옥ㆍ거울)를 폭격에서 보호할 방법만 찾느라고 골몰했다.
세계 지식인들은 지난번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동남아 등 세계 나라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 위안부 등 성노리개로 삼고 강제징용과 대량학살 등을 지적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 731부대를 창설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여러나라 민간인 등을 잡아다가 마루타로 만들어 수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生體實驗)을 한 후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었다.
일본은 1944년 패전 1년반전부터 식민지 조선에 대한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을 강제로 적용시켜 한국의 탄광을 비롯해 중국ㆍ대만ㆍ사할린ㆍ일본 본토 등 수백만명을 끌고가 탄광ㆍ철도건설 등에서 노예처럼 일하면서 수십만명이 구타를 당해 성한 몸이 아니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일본 정부에 위안부와 강제 징용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함께 배상금을 청구하는 작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