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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칼럼]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이헌동 칼럼]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창원일보 | 입력 : 2026/05/2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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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 "깨달음은 어떤 것이고 환생이 되는 것일까가 궁금하다"고 하셨다. 이런 질문을 하신 연유를 물어보니 "어리석게 살다가 갈 날이 다가오니 이런 것들이 궁금해진다"고 하셨다. 이번 칼럼은 깨달음, 다음 칼럼은 환생에 대해 써 보고자 한다.

 

정답이 없는 질문 같아서 우선 깨달음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표준국어대사전),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고려대한국어대사전)으로 되어 있었다. 

 

◆어리석음을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지유즉리 이유즉각(知幼卽離 離幼卽覺)`이라고 한다. `어리석음을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는 의미다.  `깨달음`을 "어리석음을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상황, 삶의 진면목을 보는 통찰력을 갖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통찰력을 지혜라고도 하는데 통찰력을 갖게 되면 문제해결을 잘 할수 있다고 한다.

 

질문을 하신 분께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어리석음을 알기에 깨달을 수 있고, 환생에 대한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고 자기가 무조건 옳다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고 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하면 환생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깨달음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상태로 자신이 누구인지와 삶의 본질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종교와 철학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대체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은 새로운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와 삶의 본질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다. 욕심ㆍ분노ㆍ집착에 끌려다니던 마음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면, 화가 나도 화에 완전히 끌려가지 않는 상태,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상태, `내 것`이라는 집착이 약해지는 상태,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드는 상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상태 등으로 비유할 수 있다.

 

사르뎅 신부는 "우리는 영적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된 체험을 하는 영적 존재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것을 각성하는 것도 깨달음이다.

 

인도 출신의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는 다음의 우화를 이야기한다. 한 여인이 중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는데 아득한 곳에서 어떤 음성이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들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네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여인은 알 수 없는 음성과의 대화 후 병에서 회복되었고, 그 후 삶이 달라졌다. 자신이 규정 지은 한정된 나에게서 벗어나 더 역동적인 존재로 살게 된 것이다.

 

내가 나라고 여기는 나의 자아 이미지는 다른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암에 걸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암환자와 동일시하며, 암환자로 살다가 암환자로 생을 마친다. 암에 걸리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동일시된 그 `암환자`가 존재의 다른 가능성들을 부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 승려 아잔 브라흐마는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말기 암환자인 여성 수행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병실 문에 `방문객 절대 사절! 아잔 브라흐마는 예외`라고 크게 써붙였다. 

 

모두가 그녀를 오직 `암환자`로 대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암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로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은 아잔밖에 없다고 했다. 그녀를 찾아간 아잔은 곁에 앉아 한 시간여 동안 농담을 해서 그녀를 웃겨 주었다. 병원에 입원한 누군가를 방문할 때는 환자가 아닌 그 인간 자체와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아잔은 썼다.

 

자신의 불행한 어린 시절, 실패한 경험, 상처 입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가는 일은 흔하다. 또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신을 `못생긴 사람`, `뚱뚱한 사람`, `늙은 사람`, `못 가진 사람`과 동일시한다.

 

깨달음의 출발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물음은 `나는 무엇이 아닌가 `가 전제되어야 한다. 역할을 존재로 착각할 때 공허가 싹트며, 이 공허감은 더 많은 외부의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 (류시화의 "나의 품사에 대하여" 중에서 발췌)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의 어둠이 걷히는 것", 즉, 착각과 집착 속에서 살다가 진실을 바로 보는 것이 깨달음으로 "깨달음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 안에 있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고 한다.

 

누구든지 어떤 계기로 깨달을수 있는데, 깨달음이 오려면 우선 배우려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배움의 지극함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깨달음이 온다고 한다.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은 "증오와 애정을 끊어버리면 모든 것이 명백하게 그 실체가 보인다"는 말이다. 

 

자기중심성이 높은 사람은 명백하게 상황이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위주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깨달음이 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배려할 줄 모르고 주기보다는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정저지와가 되어 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모르고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깨달을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려말 왕조의 누적된 폐단과 관료와 기득권인 귀족과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으로 개혁이 절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일체론을 주장하여 불교관을 바로잡고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던 보우(普愚) 스님은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면서 이런 시대 상황을 배움의 소재로 용맹정진하여 깨달음을 체험한 뒤 시를 남겼다.

 

悟道詩(오도시)

 

[一亦不得處(일역부득처) 踏破家中石(답파가중석)

回看沒破寂(회간몰파적) 看者亦已寂(간자역이적)

了了圓陀陀(료료원타타) 玄玄光○○(현현광삭삭)

佛祖與山河(불조여산하) 無口悉呑○(무구실타각)

 

하나도 얻을 것이 없는 곳에서 집 가운데 돌을 밟아 깨뜨렸네

돌아보니 깨뜨린 자취도 없고 돌아본 자도 없어 고요하도다

분명하고 둥글고 뚜렷하며 그윽하여 광명이 번쩍이니

부처와 조상과 산과 강을 입 없이 모두 삼켜 버렸네

 

이 시는 일체가 적멸된 무심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대상을 대하여 한결같은 부동심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통한 진면목을 보는 무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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