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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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국(대구가톨릭대 창업경영학과 교수 / 논설위원 / Saxophonist / 교육부ㆍ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상) |
신조어 ‘껄무새’.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는 뜻의 ‘무새’와, 세상사 모든 결정 뒤에 따라붙는 후회의 말 “~할걸(껄)”이 합쳐진 말이다. 요즘 세상 풍경이 꼭 그렇다. 올바른 사용설명서도 없이 공약(空約)만 반복되는 생계형 선거판, 그리고 투전판처럼 변해버린 ‘삼전닉스’ 중심의 한국 주식시장까지. 살아보면 늘 장밋빛 미래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닌가. 참 어이없는 세상이다. 원래 ‘어이’란 맷돌의 손잡이를 뜻한다. 삶의 중심축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의미다.
우리의 삶까지 선거판과 주식판에 모두 맡겨도 되는 것일까. 지금은 ‘살걸·팔걸·할걸·말걸’의 4껄 시대다. 특히 주식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숨부터 나온다. 주식을 하지 않으면 바보 같고, 해도 바보가 되는 시대다. 빚투족과 영끌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저축과 현금의 가치는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주식시장에 들어가자니 하루하루의 등락이 심장을 흔든다. 개미가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오른다. 기다리면 날아가고, 따라붙으면 물린다.
결국 남는 말은 늘 같다. “살걸”, “팔걸”, “기다릴걸”, “말걸”. 우리는 어느새 ‘껄무새’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 증시는 특히 더 그렇다. 이미 노름판처럼 변해버린 느낌이다. 시장 전체가 몇몇 대형주, 그중에서도 이른바 ‘삼전닉스’의 흐름에 지나치게 묶여 있다. 반도체가 오르면 한국 경제 전체가 살아나는 듯하고, 반도체가 흔들리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두 회사는 한국 산업의 핵심축이다. 수출과 고용, 기술력, 외국인 수급까지 한국 경제의 중심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데 있다. 증시의 희망도 불안도, 개인투자자의 계좌까지도 너무 자주 ‘삼전닉스’ 하나에 볼모로 잡힌다. 좋은 회사와 좋은 가격은 다른 문제 아닌가.
더 답답한 것은 개인투자자의 위치다. 외국인은 큰 흐름을 타고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기관은 자금력과 정보력으로 움직인다. 개인은 그 사이에서 뉴스 한 줄, 호가창 하나, 외국인 순매수 숫자 하나에 마음이 흔들린다. 어제는 저평가라더니 오늘은 과열이라 하고, 아침에는 상승 추세라더니 오후에는 차익실현 압박이라고 한다. 같은 종목을 두고도 해석은 매번 달라진다. 결국 개인은 확신보다 불안으로 매수하고, 전략보다 후회로 매도한다. 정부 정책도 오락가락하고, 공직자들의 자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민초들의 박탈감은 깊어지고 한숨만 늘어난다.
그렇다고 주식을 외면하기도 어렵다. 예금만으로는 자산을 지키기 힘들고, 부동산은 진입장벽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노후와 물가,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자산을 굴려야 한다는 압박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시장을 떠나지 못한다. 손실을 보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수익을 내고도 마음 편히 웃지 못한다. 이제 주식은 단순한 투자를 넘어 불확실한 시대의 생존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장밋빛 기대가 아니라 냉정한 기준이다. 공동체를 지탱할 정부의 역할과 예측 가능한 정책 또한 중요하다. 정부도 언론도 온통 선거판만 바라보는 듯하다면, 그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순히 “오늘 오를까, 내릴까”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비중인가”라는 질문이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에서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껄무새의 삶’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살걸, 팔걸, 기다릴걸, 할걸, 말걸….”그러나 후회만 반복해서는 계좌도 삶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제는 ‘껄’에서 벗어나 ‘기준’으로 가야 한다. 시장은 늘 흔들리고 뉴스는 늘 바뀐다. 외국인과 기관의 방향도 언제든 뒤집힌다. 그 속에서 개인이 끝내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원칙이다. 껄무새처럼 웃고 울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세상 풍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준으로 살아갈 것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정책과 스스로 시장 흐름을 읽는 판단력이다.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며, 씨 뿌려 거두는 농심(農心)의 자세로 살아가는 삶. 세파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가 결국 마지막 승자가 되는 길 아닐까.
민중의 다양성은 각자의 올바른 기준을 가진 유권자와 투자자가 될 때 더욱 빛난다. 삶은 태산준령 같고 희로애락의 연속이라는 선현들의 지혜가 새삼 떠오른다. 어이가 있는 맷돌 같은 세상 풍경이 그리운 때다. 한평생 44년 넘게 국내외 산·학·군·관을 경험한 필자의 다소 꼰대 같은 이야기가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지는 시대다. 종강을 앞두고 애제자들에게 어떤 삶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문득 깊은 혼돈 속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