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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한 칼럼]
기억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스트레스가 해마를 멈추게 했을 뿐

[신재한 칼럼]
기억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스트레스가 해마를 멈추게 했을 뿐

창원일보 | 입력 : 2026/06/0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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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뇌교육학과 학과장 / 교육부 연구사 역임 / 한국상담학회 노인상담학회 대외협력위원장, 수련감독    

얼마 전 한 기업의 임원 교육에서 만난 50대 중반의 임원 A씨는 자신의 건강보다 기억력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꾸 깜빡합니다. 직원 이름도 순간적으로 생각이 안 나고, 분명 회의에서 하려던 말도 잊어버립니다. 중요한 자료를 찾으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습니다"

 

그는 혹시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드러난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최근 1년 가까이 구조조정과 경영 실적 압박 속에서 하루 평균 5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있었고, 주말에도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례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면 가장 먼저 나이나 치매를 떠올린다. 그러나 뇌과학은 기억력 저하의 가장 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만성 스트레스`를 지목한다.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기억의 통로를 일시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기억력 저하를 경험한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 시험지를 받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현상, 발표를 앞둔 직장인이 준비한 내용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는 경험, 중요한 자리에서 상대방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상황 모두가 비슷한 원리로 설명된다.

 

뇌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그 답은 우리 뇌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해마(Hippocampus)`에 있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기관이다. 낮 동안 경험한 수많은 사건과 정보를 정리하여 장기 기억으로 옮기는 역할을 담당한다. 마치 거대한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사서와 같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단순히 저장된 정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기억은 끊임없이 분류되고 정리되는 과정이다. 해마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새로운 정보를 배우고, 저장하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올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마가 사용에 따라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00년 영국 런던대학교 연구진은 런던 택시기사들을 대상으로 매우 유명한 연구를 발표했다. 런던은 세계적으로도 복잡한 도로망을 가진 도시다. 택시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수만 개의 거리와 수천 개의 건물을 외워야 한다.

 

연구진이 베테랑 택시기사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공간 정보를 담당하는 해마의 특정 부위가 일반인보다 훨씬 크게 발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 연구는 뇌가 고정된 기관이 아니라 경험과 훈련에 따라 변화하는 `신경가소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해마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하다는 점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에서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코르티솔은 원래 생존을 위한 필수 호르몬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혈압을 높이고 에너지를 공급해 몸이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문제는 스트레스가 장기화될 때 발생한다.

 

해마에는 코르티솔 수용체가 다른 뇌 영역보다 많이 분포해 있다. 따라서 스트레스가 반복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곳이 바로 해마다.

 

미국의 신경내분비학자 로버트 사폴스키는 장기간 높은 수준의 코르티솔에 노출될 경우 해마의 기능 저하와 구조적 위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 연구에서도 만성 스트레스가 지속된 사람들에게서 기억력 저하와 해마 위축이 관찰됐다.

 

그렇다면 왜 시험만 보면 머리가 하얘질까.

 

카이스트 김대수 교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뇌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원시시대 인간이 맹수를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그 순간 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단어를 기억하는 능력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이다.

 

뇌는 제한된 에너지를 생존에 집중하기 위해 학습과 기억 기능을 일시적으로 억제한다. 쉽게 말해 해마에게 "지금은 공부할 때가 아니라 도망칠 때"라고 명령하는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실제 맹수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승진 경쟁, 업무 압박, 경제적 불안, 인간관계 갈등 등 다양한 스트레스가 뇌를 끊임없이 위협 상태로 몰아넣는다.

 

결국 현대인의 뇌는 매일 맹수를 만난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트레스가 모든 기억을 똑같이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사에게 크게 혼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교육받은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편도체와 해마의 역할 차이 때문이다.

 

편도체는 감정, 특히 공포와 위협을 담당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편도체는 더욱 활성화된다. 위험한 경험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강렬하게 저장하는 것이다.

 

반면 사실과 정보를 저장하는 해마는 기능이 억제된다.

 

결국 감정이 실린 부정적 기억은 오래 남고, 학습한 내용은 쉽게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원리는 직장 내 스트레스뿐 아니라 학교폭력, 사고 경험, 트라우마 현상 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다행히 희망적인 사실도 있다.

 

해마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성되는 몇 안 되는 뇌 영역이다.

 

뇌과학에서는 이를 `신경발생(Neurogenesis)`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해마를 회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비싼 건강식품이나 기억력 향상 프로그램을 떠올리지만 연구 결과는 의외로 단순한 답을 제시한다.

 

바로 운동이다.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과 의사 존 레이티 교수는 운동 중 생성되는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를 "뇌의 천연 비료"라고 표현했다.

 

BDNF는 신경세포의 성장과 연결을 촉진하고 해마 기능을 향상시킨다.

 

2011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연구진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1년 동안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실시했다. 연구 결과 참가자들의 해마 부피가 증가했고 기억력 또한 향상됐다.

 

운동은 근육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담당하는 뇌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억력이 떨어질 때 종종 자신을 채찍질한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한다.

 

그러나 지친 해마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회복의 시간일 수 있다.

 

충분한 수면, 규칙적인 운동, 깊은 호흡, 그리고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는 여유 말이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기 바란다.

 

"정말 기억력이 나빠진 것일까, 아니면 내 뇌가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기억력이 아니라 스트레스일지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도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회복력이 강한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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