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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칼럼]
클레오파트라의 삶과 환생 이야기

[이헌동 칼럼]
클레오파트라의 삶과 환생 이야기

창원일보 | 입력 : 2026/06/0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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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필자는 초등교사ㆍ중등교사ㆍ특수교사ㆍ전문상담교사ㆍ직업기술교사 등의 교원자격증을 지니고 다양한 교육을 하였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 및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국가사업으로 헤어미용사 맞춤형 직업훈련을 하는 내일이룸학교에서 미용사(美容史)를 교육하였다. 이때 선입견에서 벗어나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움 때문에 진정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였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여성은 그 아름다움으로 많은 것들을 얻기도 하지만, 아름다움 때문에 진정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당대의 영웅을 차례로 홀리고 비극적인 운명에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하는 호기심에서부터 그녀는 요부로서의 이미지가 확고해진다. 사실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여왕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이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한평생을 고심하며 보낸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왕실 도서관에서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당대 누구도 따를수 없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다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보여 무역도시 알렉산드리아를 통교하던 수많은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 박혁거세가 태어난 것과 같은 해에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인들에게 자주 애용된 이름이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이들의 기원은 마케도니아에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스스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파라오로 인정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통치 당시 이집트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고 왕가는 이집트의 전통과 함께 그리스의 문화도 유지해가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사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고 함께 왕위에 올랐다. 이집트 왕실은 라지드법으로 근친혼을 법으로 정해 왕실의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을 막고 있었다. 즉위 당시 클레오파트라 7세의 나이는 18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10세였다.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잠시 몸을 피한 클레오파트라 7세는 더 큰 위협이자 기회를 만나게 된다. 이집트까지 온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를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왕좌와 이집트의 운명을 위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난국을 타개하고자 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나이는 21세였고 카이사르는 52세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독립과 왕좌를 보장받는 대신에 카이사르의 여인이 되었다. 자신을 어렵게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무찌를 군대를 얻는다. 결과적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군대로 내부의 적들을 일소하고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 받게 된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카이사리온(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뜻)을 낳고 카이사르가 로마에 개선할 때 함께 빈객으로 따라 갔다. 연인 카이사르와 아들 카이사리온을 통해 새로운 야망을 꿈꾸게 된다. 아들 카이사리온이 로마의 황제가 되어 이집트와 로마 전체를 통치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녀의 야망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부질없는 희망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로마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 공개된 그의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 뿐만 아니라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나라 이집트를 위해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을 하고 로마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주인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자살을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나라 이집트를 위해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이고 유혹했다. 안토니우스도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나라를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안토니우스의 매력에 사랑에 빠졌다. 정당한 결혼을 통해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후계권을 보장 받았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요구를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로마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주인을 꿈꾸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의 운명까지 쥐고 있던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악티움에서 후퇴하여 이집트까지 쫓겨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겨 최후를 맞이하였다.

 

대제국을 꿈꾸던 야망도, 가까스로 지켜온 이집트의 독립도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을 깨달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살을 선택한다.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개선행렬에 포로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모욕을 당하지 않을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였다. 

 

서기전 30년 8월 30일,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하고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꽃 속에 누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일부러 놓아둔 독뱀에 가슴을 물려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끝이 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은 아니었다.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였다. 여러나라의 말을 할줄 아는 유능한 외교가 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선택한 로마의 영웅들이 실패함으로 자신도 나라도 망하게 되었다.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사적으로 알게하는 삶이었다.

 

◆인간은 거듭 환생을 한다는 것이 뱅슨이 쓴 <전생이야기>에 나온다.

 

인간이 거듭 생을 반복한다는 재생이론을 이탈리아 제노아 대학의 시마이틀 교수가 초심리학적인 최면술을 이용하여 증명하였다. 뱅슨이 쓴 <전생이야기>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전생이 많이 나온다. 카이사르는 일본 막부의 쇼군으로서의 삶을 거쳐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으로 환생하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은 적이 있다. 그녀와 클레오파트라의 연관성은 새삼스럽게 특별한 게시라고 할 수도 없다. 수많은 투시자와 심령가, 신비가들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전생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였다고 지적해왔다. 

 

기원전 50년경의 인물인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삶에 얽힌 미스터리 중에는 그녀가 기원전 350년경에도 그리스에서 클레오파트라란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는 신기한 사실이 있다. 이 또다른 클레오파트라는 필립  2세, 즉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이며 후생에 품페이우스로 환생한 바 있는 마케도니아 왕의 젊은 부인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신이었으니, 이 모든 카르마적 각본을 꿰맞춰 보면 이해가 훨씬 잘될 것이다. (데이비드 벵슨의 <유명한 사람들의 전생이야기> 170~171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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