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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4회 - 2. 장미꽃 자수 청바지

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4회 - 2. 장미꽃 자수 청바지

창원일보 | 입력 : 2026/06/1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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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다음날 정오, 왕비다방의 커튼 사이로 따스한 겨울 햇살이 한 움큼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악어 형님은 심각한 얼굴로 줄 담배를 연신 피워 대고 있었고, 구 씨 형님은 밤새 잠을 못 잔 듯 눈 밑이 시퍼랬다. 대팔이는 애꿎은 성냥통에 `탁탁` 손가락을 튕기면서 한숨만 계속내쉬었다.

 

내가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장담했지만, 자기네 들이 며칠째 고민해 왔던 사안이라 모두가거의 체념한 표정들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제 밤늦게 세탁법도 찾아보고, 부분 염색도 검색해 봤습니다만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어요. 그을음이 묻은 청바지는 결국 페품밖에 안 됩디다"

 

내 말이 떨어지자 분위기는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영숙 씨도 계산대에서 우리 쪽을 힐끔거리며 무슨 말이 오가는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근데, 어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어떤 아가씨를 봤습니다. 볼 옆에 장미 문신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죠. 그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저걸 청바지에 붙이면 어떨까 생각했죠. 하지만 스티커는 세탁 한 번이면 단번에 떨어질 거다. 그래서 더 파고들어 찾아낸 게 바로 이겁니다"

 

나는 들고 온 가방을 열어 청바지 한 벌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탁자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안도의 숨에 가까웠다. 그을음이 있던 자리에 언제 그런 것이 있었냐는 듯 선명한 다홍빛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얇은 프린트가 아니라 바늘땀이 촘촘하게 살아 있는 컴퓨터 자수였다. 손끝으로 쓸면 자수실의 결이 느껴졌다. 푸른 청바지 위에 핀 붉은 장미는 얼룩을 가린 흔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디자인처럼 보였다.

 

영숙 씨가 멀리서 지켜보다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청바지를 두 손으로 펼쳐 들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나" 그 한마디뿐이었다.

 

"이거 진짜 자수예요?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더 예쁘네"

 

영숙 씨는 더 묻지도 않고 바지를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내실 문이 열렸다. 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영숙 씨가 청바지를 입고 나온 것이다. 흰색 스웨터 아래로 물 빠진 푸른 청바지가 눈길을 끌었다. 발목 가까이에 수 놓인 다홍빛 장미 한 송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카운터 옆 거울 앞으로 가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바지 끝단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허리 부분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기도 했다. 

 

"어때요?" 대팔이가 감탄조로 말했다.

 

"야, 정말 멋지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구 씨 형님도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검댕 묻은 바지라카더니 이건, 완전 딴 물건이 됐네" 영숙 씨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원단도 좋고 물색도 곱네요. 근데 이런 건 너무 싸게 팔면 안 되겠는데요?" 모두의 시선이 영숙 씨에게 향했다.

 

"왜?" 악어 형님이 묻자 영숙 씨가 웃었다.

 

"이런 건 싸게 팔면 오히려 못 미더워해요. 손님들이 이상하게 본다니까. 노점 물건이라도 비싸 보이는 건 비싸게 받아야죠" 대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노점에서 이만 원은 좀 비싸지 않겠나?"

 

"글쎄요" 영숙 씨는 바지 자수 부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같으면 충분히 사고 남겠는데"

 

그 말에 다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구 씨 형님이 무릎을 탁 쳤다.

 

"야, 성호야. 어쨌든 니 머리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을음 묻은 걸 이렇게 살려낼 줄이야. 이제사 내 숨통이 다 트인다"

 

하지만 대팔이는 계속 수긍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라고 꽃무늬 좋아하는 사람만 사면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짤 건데? 재고 남으면 큰일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대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남자용은 독수리나 번개 같은 자수문양도 생각해뒀지"

 

그제야 대팔이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렁다면 한번 해볼 만하겠네"

 

악어 형님은 여유있는 동작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남들이 흉이라 여기는 걸 장점으로 바꾸는 것. 그게 바로 장터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법이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절망으로 눌려 있던 얼굴들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탁자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 쏟아져 나왔다. 여러가지 자수 무늬 이야기가 오가던 중 대팔이가 다시 내 쪽을 쳐다봤다.

 

"근데 성호야. 니 잘 알아봤나? 자수라 하면 공임이 꽤나 비쌀텐데"

 

"아! 그 문제는 니가 걱정 안 해도 된다"

 

나는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내 악어형님과 대팔이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오늘 오전에 시제품 만들려고 서대신동 자수 공장에 다녀왔습니다. 천 장 넘으면 한 장당 삼천 원에 해 준답니다"

 

내 말을 듣던 악어 형님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성호 니가 생각하는 판매가격도 내친김에 함 이야기 해봐라"

 

"형님, 청바지 원가가 오천 원입니다. 자수 비용까지 포함해도 원가는 팔천 원 정도입니다. 지금 노점에서 겨울 청바지 만 오천 원에 팔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물건은 이만 원 받아도 됩니다"

 

대팔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손님들이 선뜻 살까?"

 

"처음엔 망설이겠지. 그래도 물건만 좋으면 팔린다"

 

나는 메모장을 가리켰다.

 

"형님은 장당 만이천 원에 넘기고 소매상들은 적당히 이익 남기면 됩니다. 소매상들은 하루 열 장만 팔아도 장사할 만합니다"

 

악어 형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기분 좋게 씨익 웃었다.

 

"성호야. 사천 원씩 남길 필요 없다"

 

"예?"

 

"이것, 내가 돈 벌자고 시작한 일 아니다. 이천 원만 붙여서 넘기자"

 

"그래도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사천 장이면 이천 원만 붙여도 된다. 무엇보다 노점상들 살 길부터 열어야지" 잠시 말을 멈춘 형님이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이번 일은 네가 다 살렸다" 형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힘껏 잡았다. 그러더니 다방 안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자, 인자 됐다. 오늘은 우리모두 기분 좋게 한잔하자"

 

형님이 계산대 쪽을 향해 소리쳤다.

 

"영숙아. 손님도 없는데 니도 고마 샤타 내리고 우리하고 같이 가자"

 

악어 형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오랜만에 다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장사는 나쁘지 않았다. 도바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적게는 하루에 열 벌, 많게는 열대여섯 벌 넘게 나가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기대보다 덜 팔렸고, 어떤 날은 준비한 물건이 모자랄 정도로 나갔다. 장미 자수가 놓인 청바지를 도바 앞에 걸어 두면 사람들 발길이 한 번쯤은 멈췄다. 그해 겨울 나와 주위의 의류 노점상들은 그 청바지 덕분에 한철을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2월 하순. 악어 형님으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성호야, 추운데 고생 많제? 니 쓰던 자리 근처 도바 빈 게 하나 나왔다. 아직 날도 추운데 오일장 떠돌지 말고 다시 부산으로 오너라"

 

지나고 보니 떠돌이 오일장은 배울 것이 많았지만 늘 불안정했다. 장마다 여관을 전전해야 했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그날 장사는 반쯤 포기해야 했다. 반면 국제시장은 달랐다. 골목마다 아는 얼굴이 있었고, 어디를 가도 인사를 건넬 사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 장사의 출발점이었다.

 

◆잊히지 않는 얼굴

 

사실, 오일장 중에서 밀양장 수입은 나쁘지 않았다. 주인 부부도 나와 친했고 인심도 좋았다. 그래서 계속 장사를 이어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건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벌써부터 장사보다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삼랑진에서 밀양으로 넘어오던 날 우연히 만났던 그 여인.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장날마다 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의 약속과는 달리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거창과 청도, 합천장을 함께 돌던 장꾼들과는 막걸리 한 사발로 작별을 대신했다.

 

"성호 씨, 다음에 또 봅시다" "부산 가서도 잘해요" "정 들자 이별이네. 언제든지 다시 오소. 당신 자리쯤은 우리가 잡아 줄 테니"

 

2월의 어느 끝자락. 나는 다시 국제시장으로 돌아왔다. 자갈치 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골목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운 냄새였다. 도바들이 빼곡히 들어선 시장 골목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떤 이는 손님을 불러 세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목청껏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골목 어귀에 서서 그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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