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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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국 / 작가ㆍ논설위원ㆍ색소포니스트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전쟁은 승패를 가르면 끝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승전보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폭력에 익숙해진 인간을 일상의 질서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가 3천 년을 건너 살아남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영웅의 모험보다 전쟁에서 돌아온 인간이 어떻게 다시 남편과 아버지, 이웃과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 오래된 질문을 현대의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거대한 바다와 신들의 분노가 장관을 이루지만 작품의 중심에는 `귀향`이라는 묵직한 명제가 놓여 있다. 오디세우스가 건너야 했던 가장 험한 바다는 지중해가 아니라 자기 안의 욕망과 오만이었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것은 그의 지략이었지만 귀향을 늦춘 것은 그 지략에 대한 자만이었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살아남은 뒤 이름을 밝히며 승리를 과시한 순간, 그는 더 긴 표류를 자초한다. 지혜가 절제를 잃으면 교만이 되고, 성취가 성찰을 잃으면 몰락의 출발점이 된다. 인간은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 자신을 더 경계해야 한다.
《오디세이아》에서 귀향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다. 전쟁과 유혹 속에서 훼손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정신적 과정이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가 약속한 불멸을 거절하고 필멸의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 영원한 생명보다 유한한 관계를, 안락한 체류보다 가족과 고향에 대한 책임을 택한 것이다. 삶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존재하느냐보다 누구와 책임을 나누며 사느냐에 있다.
그의 귀향은 혼자 이룬 영웅적 성취도 아니다. 페넬로페는 무너지는 가정을 지켰고,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며 한 사람의 시민으로 성장했다. 돌아오는 사람의 이야기 뒤에는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의 침묵과 눈물이 있다. 귀향은 떠난 자의 발걸음과 남은 자의 시간이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지금 세계는 또다시 귀향을 잃어버린 시대를 지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 수단에 이어 이란을 둘러싼 전쟁은 국경을 넘어 중동 전체의 불안을 키웠다. 첨단 미사일과 드론은 더 먼 곳을 정밀하게 타격하지만, 그 기술은 폐허 속 어린아이의 공포와 피란민의 눈물까지 제거하지 못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다.
지도 위의 전선은 하루에도 바뀌지만 피란민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년, 때로는 한 세대가 걸린다. 포성이 멎는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건물은 다시 세울 수 있어도 잃어버린 생명과 무너진 신뢰, 증오로 갈라진 공동체는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전쟁을 시작하는 데에는 한 사람의 명령이면 충분하지만 평화를 회복하는 데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인내가 필요하다.
오늘날 지도자의 위대함도 얼마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명을 전쟁터에서 돌아오게 했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영토를 점령하는 것과 민심을 얻는 것은 다르며,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과 공존의 질서를 만드는 것도 다르다. 국민을 전쟁으로 내모는 결단보다 국민을 평화로운 일상으로 귀환시키는 책임이 훨씬 무겁다.
《일리아스》가 분노와 명예가 지배하는 전쟁의 문법을 보여주었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 이후의 삶에 필요한 문법을 말한다. 전쟁에는 힘과 계략이 필요하지만 평화에는 절제와 책임이 필요하다. 성을 함락하는 것보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어렵고, 승전의 깃발을 꽂는 것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개선보다 귀향이 어렵고, 승리보다 평화가 어렵다.
오디세우스의 위대함은 트로이를 함락한 데 있지 않다. 욕망과 오만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끝내 잊지 않은 데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멀리 진격할 용기만이 아니다. 잘못 든 길을 깨닫고 사랑과 책임의 자리로 돌아갈 용기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에게 남는 질문도 그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진격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오게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