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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6/23  창원일보
여름 단상
김 명 훈 김해벨라에세이 회원

김 명 훈
김해벨라에세이 회원
엊그제, 아내의 조리사 시험이 있어 마산에 있는 모 대학교에 갔습니다.
 

시험 과제를 걱정하는 아내의 긴장한 얼굴이 안쓰럽기는 했어도, 방학이라서 한산한 교정의 여름이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맑습니다. 서둘러 아내를 시험장까지 바래다주고는 짧은 시간이지만 눈여겨 보아 두었던 담쟁이넝쿨 타고 오르는 등나무 벤치에 책 한 권을 들고 찾아들었는데, 아까부터 있었던 지, 여학생 둘이 그곳 벤치에서 담배를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매미 소리가 멎습니다. 나는 짐짓 겸연쩍어서 얼른 학생들에게서 눈길을 거두었습니다. 그네들만의 휴식에 뛰어든 낯선 방해자의 생경함이 미안해졌습니다.
 

금연이 미덕이 되어버린, 흡연권을 보장하라는 끽연 자들의 하소연이 우스개로 들리지 않는 시절입니다.
 

하물며 스무 살을 갓 넘은 여학생들이라면 자기들만의 여유를 깨 버린 방해자에 대한 원망은 둘째 치더라도, 도리어 나의 눈치 때문에 그 청춘의 당당함이 꺾일까, 마음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선 책을 펼쳤습니다. 때를 가리지 못한 무례한 중년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무언의 몸짓이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통했는지 여학생들은 자기들 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흡연을 즐기다가 이내 자리를 떴습니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그깟 담배 하나를 두고 마음을 쓰는 나 자신이 소심하게 여겨지지만, 이십년 정도의 세대 차를 가뿐하게 뛰어넘어버린 이심전심의 깨달음(?)이 자못 유쾌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서의 즐거움이 心中에 가득하여 물아일체가 아닌, 서아일체가 됩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아까의 그 여학생들이 흡연을 즐기려는 지, 벤치에 앉아선 소근거리다가 담배를 태우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네들은 나를 등나무 벤치의 기둥 같은 분신으로 여기고 있나 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내가 주위의 정경과 하나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책을 덮고 앞을 봅니다. 푸른 산의 골짝마다 어김없이 박혀 있는 철탑들. 산을 보려면 철탑도 보아야 하는 어긋난 경치들에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산을 보려면 산만 보였으면 좋겠는데, 철탑도 보이니 말입니다. 철탑 사이로 이어지는 팔뚝만 한 전선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편의가, 온당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하더라도, 과연 `윤택의 속도`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지름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철탑들 탓에 오랜만에 맞이한 정서의 혜택이 살짝 불편해지니 말입니다.
 

`미인의 얼굴에 잘못 찍힌 점은 용서할 수 있어도, 잘 쓰인 서정詩에 잘못 쓰인 단어 하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딱 그 짝입니다.
 

`최소한의 개발`이 개발론자들의 변명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말이 사람에게는 통하겠지만, 자연의 침묵에 통하지는 않겠지요. 자연 아래 문명이 있고, 문명 아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물을 일이 아니라, 자연에게 물을 일입니다.
 

풀색이 짙어지고, 꽃빛이 화려합니다. 매미도 목을 틔어 소리에 유장함이 더해 가니,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눈을 감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들이 사각거리는 소리, 풀벌레들의 숨죽인 울음 소리, 저 앞산에서는 새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춘생추멸의 한가운데 있는 여름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의 축축한 땀처럼 끈적끈적한 내 여름의 끝에는, 이렇듯 사람처럼 여러 가지 말을 하지 않아도, 각기 가진 목소리로 여름을 나는 의지들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반드시 권력의 퇴락,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치에 따라 피고 지는 일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것이며, 열흘을 피어 있기 위해 수백 일을 인내하는 `화룡점정`의 고뇌가 있을 것입니다. 제 빛을 낼 때가 오면 꼭 붉어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 아래 도로에서 날카로운 기계의 굉음이 들려 옵니다.
 

쏴아 ――, 기다렸다는 듯 매미 소리가 청명한 하늘을 뚫고 날아오릅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 살아 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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