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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ㆍ대가대 교수ㆍ색소폰니스트 지휘자ㆍ교육부ㆍ대한민국학술원 우수 저서(저자) 학술상ㆍ금연홍보대사 |
가정의 달 5월, 꽃집 앞에는 온갖 카네이션을 고르느라 분주한 이 땅의 자식들이 모여든다. 어린이날 다음에 어버이날은 오늘처럼 다가온다. 논두렁처럼 굽은 허리춤과 억센 말발굽 같은 손으로 묶던 어머니의 온갖 보따리, 한평생 나무 심는 마음으로 통 말씀이 없으신 백세(百歲)로 가는 아버지를 잠시 떠올리며 필자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한마디 전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감사와 정(情)의 표현이 충분할까?
요즘 세대 자식들의 효도는 점점 세월처럼 `스마트`해지고 단순해지고 있다. 스마트폰 속 짧은 영상 편지, 계좌로 송금한 용돈, 식당과 효도 공연 예약 알림. 여행 티켓 등등. 정성보다 `편의`가 앞서고, 감정보다 `형식`이 남는다. 부모들은 말한다. "바쁘니 이렇게라도 챙기는 게 어디냐"고. 과연 그럴까? 바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던가. 이 세상의 진심은 늘 시간을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부모는 늘 `주는 자`였고, 자식은 늘 `받는 자` 였다. 자식 낳고, 키우고, 먹이고, 울음을 달래주던 부모는 늘 한없이 무조건으로 오롯이 주기만 했다. 무릎 위에 앉혀 먹이고 잠재웠던 자식들. 부모 손 잡고 요양병원 가던 자식, 입관(入棺)하던 때. 자식들 손이 언제부터 그렇게 떨리고 굳었을까? 어버이날 하루, 자식들은 종종 `부모를 기쁘게 하는 날`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날이 부모에게는 `마음이 가장 아픈 날`이 되기도 한다.
전화 한 통에 담긴 미안함, 오랜만에 들린 발걸음의 어색함, 혹은 아예 아무런 연락도 없는 적막함. 그럴 바엔 차라리 평범한 월요일이 낫다고 말하는 부모도 있을 정도다. 효도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1년에 하루` 꽃으로 퉁칠수 있는 가족관계였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효도는 사랑의 기억이고 진심의 태도다. 젖은 머리를 닦아주던 손, 이유 없이 자식을 한없이 믿어주던 눈빛을 잊지 않는게 부모의 마음이다.
금방 시들어버리는 카네이션 한 송이보다, "이제는 걱정 마시고, 여생(餘生)을 건강하게 마음껏 즐기세요"라는 말이 오히려 구들장의 아랫목처럼 부모의 마음을 더 오랫동안 따뜻하게 하지 않을까? 가끔은 이렇게도 말해보자. "어머니, 그때 왜 그렇게 우셨어요?" "아버지, 그때 나 때문에 속상하셨죠?"처럼 기억 속 서로의 상처를 꺼내 진심으로 물어주는 그 한마디가, 오히려 부모에게는 오래 묻어두었던 속마음을 꺼낼 용기를 준다.
`나도 너희들처럼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러면 자식도 알게 된다. 부모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늘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음을.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 해, 한 달,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작아진다. 목소리와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고, 눈은 흐려지고, 기억과 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효도하고 싶을 때 이미 부모는 없다`는 말이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땅의 자식들이여, 어버이날 하루쯤은 `나`를 위한 날로 삼자. 금방 시들어지는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기 전에 부모의 손을 꼭 잡고, 이 시대 말라가는 정(情)의 샘에 따뜻한 말부터 한 아름 부어드리자. "고맙습니다"보다 더 절절한 "미안해요" 한마디를. 그 한마디가, 부모의 남은 삶을 얼마나 환하게 비출지 모른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자, 나중에 너희들의 아이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어버이날의 유산`이요, 값진 교훈이 아닐까?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한평생 나무 심는 자들이요, 자식들은 과일을 따 먹는 놈들이 아닐까? 나이 든 부모를 깊은 산속에 버리던 고려장(高麗葬) 가던 길에 지게 위의 어머니는 자식 몰래 솔잎을 따 뒷길로 뿌렸다. 혹여 집으로 돌아가는 자식이 길을 잃을까? 저승길 가면서도 오롯이 자식 걱정뿐. 부모의 마음이다. 어버이날. 오늘만큼은 큰소리로 외치고 싶다. "이 땅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늙어봤나? 부모들은 젊어봤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