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즐겨찾기  l  시작페이지    l  2020.8.13 (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 메일전송  기사 출력  기사스크랩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http://www.changwonilbo.com/news/233522
발행일: 2020/07/28  창원일보
[이상호 칼럼]
정의란 무엇인가

`전략과 전술` 저자
희랍(그리스를 한자로 표기)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테미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율법의 신)의 딸로 정의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여신이다보니 오늘날 이 디케(Dike)를 본떠 정의의 여신상을 만들었다.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과 칼을 들고 두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다. 여기서 저울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데 있어 편견을 버리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하겠다는 것을 말하고 칼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자에 대해서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을 의미하고 두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것은 정의와 불의의 판정에 있어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상들은 눈을 가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신(神)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지 않아도 공정하게 심판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대법원 앞에 있는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상은 어떨까? 한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가지고 앉아 있는데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은 법에 따라 사실관계를 명확히 판단하겠다는 의미고 또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 여신상은 눈을 뜨고 있다. 즉 서양 같은 경우는 눈을 가리지 않으면 많은 정보가 들어오는 만큼 편견이 생겨 평등한 판결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종(흑인, 백인), 성별, 외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공평하게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여신이기에 눈은 가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나라처럼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어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기 위해 정의의 여신상은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의로운 판단을 위해 모든 행동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의의 여신상은 각 나라마다 약간의 표현이 다를 뿐 법의 공정성을 알리는 뜻에서 법원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正義)란 무엇일까? 정의는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을 정의라 하는데 정의의 개념은 워낙 다양해 학자들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가령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너무 복잡하고 잘 모르겠다고 했다. 즉 개인의 정의를 규정하기는 너무 어렵고 국가는 개인으로 이뤄 졌으니 국가와 개인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 국가의 정의를 알면 개인의 정의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정의는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지혜, 용기, 절제로 이 기능들이 잘 돌아가야 정의로운 국가이고 개인 역시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것을 정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공동체의식에 주입해 발휘가 될 때 그 한 사람의 정의감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쳐 이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의고 또 미국의 철학자인 롤스의 정의는 제1원칙인 기본적 자유의 원칙과 제2원칙인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둘로 나누는데 기본적 자유의 원칙은 모든 사람은 언론과 사상, 종교, 신체의 자유 등에 대해서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평등이 존재하고 이러한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 모두 에게 똑같은 재화를 나눠주면 이 또한 기본적 자유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롤스는 제2원칙인 차등 분배의 원칙을 만드는데 즉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에게 최대의 이득이 주어졌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1원칙이 제2원칙보다 우선시 돼야만 하고 제2원칙 안에서는 기회균등의 원칙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부와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와 권력의 계층화는 기회 균등의 원칙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원칙을 잘 따르면 그것을 정의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로 공리주의의 정의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의 원칙으로 최대다수 최대행복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시속 100㎞로 빠르게 달리고 있는 기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그때 앞의 선로위에 일하는 다섯 명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기차를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오른쪽 비상철로를 보니 단 한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기차를 어느 방향으로 하던 간에 결국 누군가는 죽는 상황이다. 이럴 때 과연 누구를 살려야 할까? 공리주의자들은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1명의 희생(죽음)보다 더 났다는 것이다. 즉 좋은 결과를 산출했다면 수단은 도덕적으로 충분히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결과론적 윤리설을 보는 것이다.
 

반면에 칸트의 목적론적 윤리설은 결과와 무관하게 도덕 법칙에 어긋나는 수단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며칠 전에(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송승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숙명여고 교무부장의 두 딸의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피고인들(쌍둥이 자매)에게 아버지가 징역 3년형을 확정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고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고 있다며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르며 이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고 말하자 이에 쌍둥이 자매 언니는 최후 진술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검사가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항변했다. 이런 쌍둥이 자매 언니의 발언은 비록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결과가 하지 않아서 얻게 될 결과보다 좋을 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악한행위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칸트의 이론인 것이다.
 

이처럼 학자들의 정의(正義)를 보면 각각 해석이 다를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인간의 정의는 알기가 어렵다고 하듯이 정의가 무엇인지 완전한 해석은 힘들어 보인다. 우리가 흔히 정의라고 하면 나쁜 사람을 혼내주는 것을 정의라 한다. 하지만 그 나쁜 사람도 나름 자기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의가 있다. 그래서 정의란 각 개인이 갖는 도덕적 원칙(옳은 일)이 아닐까 쉽다.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김해가야테마파크
거창군
사천시설관리공단
김해 푸르지오 하이엔드
김해시청일자리
bnk경남은행
 기획·특집
 2019 경남사제 Song Song Festival
 경제·IT
 여론조사 샘플
 
  l   회사소개   l   광고안내   l   구독신청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   웹하드   l   메일   l  
Copyright (c) 창원일보(주) All rights reserved. 경남 창원시 성산구 비음로 3-7 1층
대표전화 055-212-0001 Fax: 055-266-0002 E-mail: 2120001@changwonilbo.com
기사 등 모든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제/복사/배포를 금합니다.
Powered by Newsbui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