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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01/19  창원일보
[정준식 칼럼]
천사, 선과 악

前)부산대학교병원 비상재난안전팀장
많은 종교에서 천사는 선한 존재로 여겨진다. 유대ㆍ기독교 전통에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선의 의인화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악은 선으로 묘사된 것의 부재 또는 반대이다. 종종 악은 심오한 부도덕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일부 종교적 맥락에서 악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묘사되었다. 악의 정의는 동기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악과 관련된 요소는 편의성, 이기심, 무지 또는 방임과 관련된 불균형 행동과 관련이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선은 쾌활함, 근면성, 절제심,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 등으로 구체화된다.
반면 인간의 치명적인 부분이라 명명한 악은 기형과 타락, 유희에의 탐닉, 오만함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과연 완전히 독립적이며, 절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인지는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예를 들어 `쾌활함`은 상황과 정도에 따라 유쾌함이 될 수도, 경박함이 될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가장 부지런한 말(馬)인 복서의 정직과 근면은 스퀼러의 탐욕에 희생되는 덕성이다. 지나친 절제는 경직된 삶을 이끌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또다른 타인의 희생이 동반되기도 한다.
 

악 또한 마찬가지다. 기형은 정상과 대조되는 모양이다. 정상은 문화마다 다르게 정의되므로 기형 또한 확정할 수 없다. 타락 또한 제각기 다른 가치관에 따라 그 결정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 유희에 탐닉하는 것도 어디까지 인지 모호하다.
결국 선과 악은 정도와 상황,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개념이며 모든 인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중인격〉의 저자 비벌리 엔젤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감정 변화를 보이거나, 상대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거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는 경우 등에 `지킬과 하이드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은 상반된 힘이 개인의 내면에 만들어내는 긴장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내면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속성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가운데 그런 측면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모든 이슬람 신도들이 탈레반은 아니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슬람 신도들이다.` 어느 마을에 붙은 현수막 내용이다.
아프간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슬람 신도들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혐오감이 혐오감을 가진 사람 자체를 괴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자들은 예전에도 많았다. 가톨릭교회안에서 마녀사냥을 했던 자들, 유대교의 바리사이들, 개신교의 극단적 원리주의자들, 극우파, 극좌파도 탈레반과 실체가 유사하다.
 

정신의학에서는 `강박성성격장애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질서나 규칙에 대한 지나친 집착, 자신의 방식이 유일하고 다른 사람들의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른다고 생각하는 자만심, 자신의 신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폭력성`을 든다. 아프간 여인들에게 말도 안되는 폭력적인 윤리를 강요하고 샤리아법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탈레반이 주는 교훈은 `천국을 만들려는 자들이 결국에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맞는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비단 아프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 공연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대화 없는 공격성과 배타적 집단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면 바로 그가 바로 탈레반이다.
아프간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 안의 탈레반들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다. 인간의 의식은 선할지 몰라도 그의 무의식에는 `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니체는 그 어떤 인간도 타자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며 그저 `선악의 저편`에서만 도덕적 가치 판단이 가능하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한 인간을 구원하는 게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이 아님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인간의 악랄함 이면의 또 다른 인격을 통해 치유자의 모습을 구현 시킨다. 매춘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통해서 구원의 빛을 조금씩 들어내면서 악의 어둠과 대조 시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은 결코 획기적으로 기적 같은 환한 빛으로 오지 않음을 그의 작품들은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더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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