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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04/23  창원일보
도도새<70> 3부 진실과 선
한 민

 

 

"다시는 기억하기 싫지만 너도 어른이 되었으니까 이해하리라 믿고 얘기할게."

 

"......"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온 얘기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고1 때 미우회라는 미술 동호회 활동을 할 때 고3 회장 오빠를 알게 되었지. 그 오빠는 전국 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실력 있는 분인데 가을이면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었어.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여러 날 밤을 새야해. 그래서 아버님을 졸라 허락을 받았지.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어. 전시회를 이틀 앞두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지. 그날따라 아이들이 비가 온다고 하나 둘씩 일찍 작업실을 떠난 거야. 나도 집에 가려는데 오빠만 혼자 두고 가기가 미안했어.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탓에 깜빡 잠이 들었어. 꿈속에서 엄마가 황급히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어. 아랫배에 통증이 심해서 눈을 뜬 건지 판단을 못하겠어. 좌우지간 눈을 뜨자 오빠와 눈이 마주쳤어. 눈을 피하면서 오빠는...... 나는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 괜히 눈물만 흐르고 ......"


지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는`미안하다. 용서해다오. 책임질게.`를 연발하며 용서를 구했어. 나는 그런 오빠가 너무 불쌍했어.`아,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착한 오빠를 힘들게 했구나.`라고 생각했어. 오히려 오빠를 달랬지. 하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계속 눈물이 흐르고, 어  깨가 축 늘어진 오빠의 모습을 보니 그렇게 더 눈물이 났어. 그리고 전시회가 끝난 얼마 뒤 오빠를 만났어. 그 날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의도적으로 자기를 유혹한 거라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더래. 어떻게 자기를 위로 하냐고. 그리고 지금껏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다닐 수가 있냐고. 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지. 처음엔 그 오빠가 맞나하고 한 번 더 확인해 봤어. 어이없게도 그 오빠는 가만히 보고 있는 나를 다시 안으려고 했어. 다시 눈물이 나고 숨이 막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왔어. 그리고 그 해 겨울 방학 때 임신 사실을 알았어. 아빠 몰래 수술해야 했기 때문에 구석진 곳을 찾다가 무허가 돌팔이 의사에게 맡긴 게 잘못이지.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앓다가 엄마와 함께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어. 중절수술의 후유증으로 임신은 기대하지 말래. 엄마는 충격을 받으셨고, 일찍 돌아가신 건 모두 나 때문이야. 그렇게 나를 믿으셨는데. 이 얘기를 네게 하는 이유를 알겠지! 그래, 너를 진심으로 아껴서 너를 피한 거야. `그런 일만 없었어도`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 양심이 허락지 않은 거지."


민채는 비 오는 날 밤에 우산을 건네주던 그녀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파도는 바닷바람을 실어 날랐다. 그녀는 바람에 흐트러진 눈물을 닦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랑 가까이 있으면서 나를 다스릴 자신이 없었어. 좋은 사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 많이 했지. 그때마다 눈물이 나는 거야. 많이 좋아했는데 바보같이 용기 없이 말도 못하고"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요."


"혼자 간직할 시효가 다 된 것 같아. 그만큼 성숙했다는 거지."


"오랫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사랑하는 거와 함께 사는 거와는 별개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사랑하는 예수님도 내 마음 속에 계시잖아. 함께 사는 것은 어쩌면 그럴듯한 추억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위로했어."

 

"그 순간 피를 말리고 진을 뺀다는데 문제가 있는 거죠."

 

"정말 사랑하니까 이렇게 다시 만나잖아. 다음에 신부랑 같이 중국으로 놀러와. 네가 만들어가는 사랑 얘기를 듣고 싶어."

 

"은하와 결혼하고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보게 되어 더 놀랬어요. 은하랑 자꾸 겹쳐보여서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정말?"


"그럼, 당연한 거잖아. 처음에는 죄짓는 것 같아서 지우려고 했는데 더 강하게 떠오르는 거야. 식사 중에는 네가 밥 먹는 모습이 보이고 같이 길을 가면 네가 옆에 서있는 느낌을 받곤 했어. 지금은 둘이 있으면 세 사람이라고 생각해. 가끔 혼자일 때 둘이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 만약에 같이 살았다면 현실은 달라졌을 거야.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고. 영원히 추억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대상이 역시 나처럼 그러하다니까 행복하고."


지현은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 먼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삼킨 짙은 어둠이 얼마 남지 않은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중이 큰 소리로 민채를 불렀다. 밤바다는 동이 틀 준비를 하느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왕진향은 현중의 팔을 당겨 지하에 있는 바(Bar)로 내려갔다. 민채와 지현은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현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민채가 말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매듭이 풀려서 그래."


"잘 자요, 누나."


"그래, 잘 자라. 그리고 네 아내에게 전화하는 거 잊지 마."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고마워요."


민채는 오늘 고맙다는 말을 두 번 했다는 걸 떠올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지현이 내리면서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남남끼리 하는 거야."


지현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동안 민채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VIP 룸은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시설이었다.


민채는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늦었지."


"아니야, 즐거웠어?"


"응, 중국 손님들이 하동 현장을 보고 대단한 감동을 받았데."


"어머, 그럼 민채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겠네."


"당연하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자랑스럽잖아. 친구들이 물으면 대답을 해줘도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노가다라고 하는 애들도 있고."

 

"하하하, 노가다 맞지. 문단속 잘 하고 잘 자."

 

"그래 민채씨! 잘 자, 사랑해."

 

"사랑해."

 

아직도 현중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향했다. 그는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하의 바(Bar)에서 왕진향의 쾌활한 목소리는 밤이 되어도 변할 줄을 몰랐다.


"이회장님, 사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글쎄요."


"사모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서시죠."


"컨소시엄은 모두 구성된 건가요?"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사모님 얘기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다른 얘기는 괜찮은 거죠?"


왕진향의 농염한 목소리가 현중을 당황하게 했다.


"진향씨,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어쩌면 그렇게 영감님처럼 말씀을 하세요? 별명이 늙은 중이라던데 그게 실감나네요."

 

"재미없게 해 드려서 죄송하네요."

 

"현중씨라고 불러도 돼요?"

 

"편하신 대로."


"현중씨, 아버님께서 현중씨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어요."


"무슨 뜻이죠?"


"이미 우종하씨에게 얘기를 다 들었어요."


"괜한 얘기를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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