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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약자의 표상이 된 처녀귀신.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귀신은 처녀다.
예외 없이 젊은 여자다. 하다못해 구미호도 암컷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처녀귀신의 인기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최기숙 HK교수는 "소복에 긴 머리, 피 묻은 입가, 턱을 내린 얼굴, 레이저를 쏘는 듯 눈에 힘을 준 처녀귀신의 모습은 귀신의 전형이라기보다 오히려 유일한 현상이라고 해도 좋다"고 단언한다.
처녀귀신은 복색이 하얗다. "한밤중에 타살된 흔적, 가족이 연루된 자살이라는 어둠의 정서와 대비된다"면서 "소복은 여자가 잠잘 때 입는 속옷차림, 무방비의 복색을 환기한다"고 짚는다. 한편으로는 "입관과 매장의 장례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수의의 전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죽음의 유니폼`이다.
"길게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은 돌보지 않은 상처와 소외를 상징하며 처녀라는 신분은 응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에 대한 죄책감, 지켜야 할 성스러움에 대한 배반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소복은 차마 보호받지 못한 처녀의 신체와 내면, 어둠과 의혹을 부각하는 일종의 문화기호"라고 해석한다.
왜 하필 처녀귀신일까? 좀비, 흡혈귀, 마녀, 유령은 코카서스 인종에게서나 실감난다. 한국인의 가슴을 파고드는 처녀귀신은 타자의 슬픔을 상징한다. 생전 누명을 쓰거나, 사랑에 배신당하거나, 강간당해 죽은 억울한 여자들이다. 처녀귀신은 못 다 푼 한 탓에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그렇게 구천을 떠돌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암약한다.
처녀귀신이 진짜 무서운 까닭은 뒤늦은 깨우침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이 우리 마음속의 죄책감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우리가, 저 무고한 여자를 죽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다. 여자를 억울한 죽음으로 내 몬 것이 어쩌면 약자에게 가혹한 사회의 책임일는지도 모른다는 그 서늘한 깨달음이 우리 모두 처녀귀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때늦은 각성의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왜 여자만, 그것도 나이 어린 미혼여성만 귀신이 되고 산 자들은 그것들을 무서워하면서도 자꾸만 불러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인가. "여성에게 혼례란 성인식과 동일시됐으므로, 처녀귀신은 미처 성인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실패자의 표상이기도 했다.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귀신의 슬픔이 공포로 자리바꿈한 데에는 이러한 내력이 작용하고 있다. 응축된 한의 밀도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로 감지되는 것"이라는 풀이다.
아울러 "귀신이 하나같이 당대 사회의 소외된 인물, 사회적 약자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볼 때 귀신이야기를 향유한다는 것은 곧 마이너리티의 문화, 소수문화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를 지닌다"면서 "한국귀신의 전형이 처녀귀신이라는 것은 곧 처녀야말로 한국사회의 약자, 억압받은 존재였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처녀귀신의 종류에서는 사회적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를 읽는다. 부모의 명에 따라 혼인해야만 한 딸, 전쟁의 폭력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처녀, 재혼가정에서 소외된 전실 딸, 1부1처로 이뤄진 가족관계망의 바깥에서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된 기생 등 보기는 많다.
"전근대 사회의 제도와 이념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귀신이 돼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현실이 가둔 상처와 비의(悲意)로 가득했기 때문에 청자들은 이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의 목소리로 여겼던 것이다" 바로, 귀곡성이다.
최 교수의 처녀귀신론 중 처녀귀신에게 섹스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처녀귀신을 면케 해준다는 상투적 코멘트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 또 하나, 이 순간 처녀귀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공포감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처녀귀신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면 무서움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두려움의 전제는 대상에 관한 사전지식이다.
/신동립 (뉴시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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