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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09/22  창원일보
[이상호 칼럼]
클레오파트라 7세

`전략과 전술` 저자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왕가의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18세의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10세)와 결혼을 하는데 이는 이집트 파라오(왕, 최고 통치자)의 전통을 따라 철저한 근친혼을 법으로 정해 왕실의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을 막고 있었기에 클레오파트라도 이 법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을 하고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즉 아버지의 무능한 정치로 인해 관료들이 나라를 마비시켜 왕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즉위한 다음해에는 유래 없는 흉작으로 굶주린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산적떼로 인해 농촌이 황폐화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데다 여기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어리숙해 자기 주위의 여러 간신들의 이간질로 인해 자기 부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든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는 잠시 시리아 쪽으로 몸을 피했는데 그곳에서 더 큰 위협을 만나게 된다. 즉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궁지에 몰리고 외부적으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데 그 방법이 카이사르를 만나는 거였다. 카이사르(그 당시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를 만난 클레오파트라(당시 21세)는 카이사르(당시52세)의 마음을 사로잡고 연인이 돼 카이사르에게 부탁을 하는데 즉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제거하고 단독으로 이집트를 통치하게 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싸워 그를 죽여 버렸고 클레오파트라는 든든한 카이사르의 지원 아래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해 다시 왕권의 자리에 복귀해 자신을 견제하던 궁중세력을 제압하고 새로이 이집트의 중흥을 꾀하는 사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 케사리온을 낳고 아들 케사리온을 이집트와 로마의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을 안고 로마로 찾아가지만 로마인들은 이집트의 이방인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돼 로마를 지배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를 미워했고 결국 로마의 미움을 산 카이사르는 공화파인 브루투스 일당에게 피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클레오파트라는 황급히 카이사르의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오고 카이사르에게 보장받았던 이집트의 독립은 다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한편 로마는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인해 카이사르의 수하였던 안토니우스장군,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받은 옥타비아누스, 양분 체제에 놓이게 됐고 이 두 사람의 세력을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나라인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선 두 사람 중 강한 세력인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해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이고 그를 유혹한다.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유혹과 매력에 빠져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자 안토니우스는 본부인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 부인을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의식 행사를 한다. 즉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이라 하고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게 로마가 정복한 동방 영지 전체를 상속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에서 그의 편을 들던 의원들, 부하장수, 측근들까지 모두 못 마땅하게 여겼고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도 불만 뿐 아니라 자기의 여동생도 안토니우스에게 버림받았으니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당시 32세)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배신자로 보고 클레오파트라(당시 38세)와 안토니우스(당시 52세)의 연합군과 악티움(그리스 서북부 프레베자)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두 지휘관의 무능으로 전략과 전술 모두 패배를 불러온 전투이다. 즉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 함대는 500척이었고 그 중 230척은 전함이었고 보병은 2만명 정도였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군은 250척의 전함과 보병 1만 6,000명으로 상대인 옥타비아누스 로마군 보다 전력이 우세하고 강력했다.
 

그래서 당초 전망은 연합군이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전에 돌입하니 프레베자 연안은 높은 파도로 인해 전투는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아 길어지면서 연합군은 군수보급의 식량이 차단돼 선원들이 굶주림과 또 연합군의 진영에서 괴질이 발생해 선원 절반을 잃는 이중고를 겪다보니 후위를 맡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전함 69척이 갑자기 전선을 이탈해 빠져나가 버리고 이를 본 안토니우스도 도망치는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전투자체를 내 팽개침으로서 싱겁게 이 전투는 끝나버린다.
 

이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됐고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이 돼 대제국으로 나아가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집트로 도망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하고 이집트는 로마에 편입돼 주(州)가 되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에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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