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엽에는 지방의 유랑극단이 북경으로 진출해 대성황을 이뤘다. 1790년에는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많은 악극단이 북경으로 모였다. 이때에 경극의 중심격인 `이황`과 `서피`를 북경에 소개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1790년을 북경극의 기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지방극에다 세련되고도 화려한 분장과 재미난 볼거리를 가미한 `경극`의 윤택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지방극과 달리 표준어에 의한 북경극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항간에는 경극의 재미가 떠들썩했지만 보수적인 황실에서는 상인들이나 좋아하는 천박한 연극이라 해 외면했다. 하지만 1860년 7월 함풍황제의 3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경극단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1884년 11월에는 자희태후(함풍황제의 왕비)가 그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궁 안으로 경극단을 불러들이면서 경극은 그야말로 천하를 주름잡게 됐다.
경극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자희태후는 특히 노생배우였던 단시페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경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생(生), 단(旦), 정(淨), 축(丑)의 네 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노생은 남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남자 주인공인 `생`에는 다시 노생, 소생, 무생의 세 가지가 있다. `노생`은 수염을 기른 점잖은 인물이다. 이들의 신분은 황실 주변의 관료이거나 장군인 경우가 많은데, 성량이 풍부한 저음이 특징이다.
흔히 여자들은 남자의 목소리에 뻑 간다고 하는데, 황후가 노생을 좋아한 것도 부드러운 바리톤 음색의 남성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에 비해 `소생`은 수염이 없는 남자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높은 가성을 쓴다. `무생`은 갑옷과 투구를 입으며 전투나 싸움을 상징하므로 곡예를 잘해야 한다.
여성의 역할은 `단`이라고 하는데, 단 중에서는 청의와 화단이 대표적이다. `청의`는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고도 얌전한 몸짓을 하며, `화단`은 경박한 여자이므로 차림새가 매우 화려하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맡았던 우희는 바로 청의였던 것인데, 장국영에 의한 우희의 몸짓과 표정은 가히 뇌쇄적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은 군인, 무뢰한, 정치가 또는 신(神)의 역할을 한다. 이 배역은 얼굴에 칠하는 색깔로 성격을 나타내는데, 진한 붉은 색은 고결과 위엄, 흰색은 배신, 검은색은 힘과 정직을 나타낸다. 정을 맡은 배우는 폭넓은 성격을 묘사해야 하므로 다양한 표현에 능숙해야 한다.
`축`은 어릿광대로서 눈과 코 둘레에 하얀 헝겊으로 점을 만들어 붙인다. 애드리브로 우스갯소리를 해서 극의 진행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기도 하며 좌중을 웃기기도 한다.
경극 배우들의 역할은 룰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그 연기에 있어서도 고정된 규칙이 있어 손, 발, 손가락의 모든 움직임은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손을 더듬거리며 걷는 모습은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을 상징하고, 뒤로 물러나며 소매 자락을 허리 아래로 크게 흔들면서 내리는 것은 화가 난 모습을 나타낸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경극이라, 이러한 점을 알고 패왕별희를 보게 되면, 패왕이 썼던 가면이며 우희의 걸음걸이, 악기의 음색과 타악기의 효과음까지 새로운 의미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경극의 복잡한 규칙들이 예전과 같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런 말 하기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여느 극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극에서도 타악기로 배우들의 동작을 지시하는데 북, 판, 징, 자바라가 쓰인다. 선율악기로는 한국의 해금과 같은 것을 쓰는데 그 중에 큰 악기인 이호는 남성의 반주를, 작은 악기인 경호는 여성의 반주를 한다. 이 외에도 비파나 월금, 삼현과 같은 현악기가 편성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민의 유희였던 지방극을 `인민의 예술`이라해 최고의 예술로 권장하던 중국 정부에서 유네스코에 세계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해 제일 먼저 내민 카드가 귀족들의 극이었던 곤극이었으니 그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하여간 이제 유투브나 구글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 `베이징오페라` 혹은 `경극`이라고 치면 즉시 가지각색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경극의 모태가 된 곤극이 유네스코지정 중국 제1호 세계무형문화재가 됐으니 세상을 바꾸는데 시간의 힘만큼 대단한 장사가 없는 듯싶다.
/윤소희 (작곡가ㆍ음악인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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