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는 해마다 연말이면 독보적인 `분노유발자`로 등장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국회는 국민의 분노 게이지를 `역대급`으로 한껏 끌어 올리는 중이다. 여와 야가 모두 상대를 향해 핏대를 올리고 삿대질을 퍼붓고 있지만, 정작 화가 나고 그래서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쪽은 그들을 여의도로 보낸 국민인데도 말이다. 국회는 지금 자신에게 위임된 예산심사권과 입법권을 사실상 방기하고 있다. 권리는 책임을 수반한다는 기본적인 명제만 상기한다면, 도대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당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연말 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느니 이를 지켜보는 일이 무척 불편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새해 예산안 처리는 고작 하루 남아 있는 법정시한(12월 2일)을 맞추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에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예산안 통과의 방망이 소리를 듣게 될 공산이 커졌다.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젊은 엄마와 아빠들이 눈물로, 혹은 무릎 자세로 입법을 간절하게 호소한 `민식이법`, `해인이법`은 물론 사회와 산업의 내일을 바꿀 유치원 3법, 데이터 3법 등도 국회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목하 여야의 극한 대치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공교롭게도 영어로 된 두 단어, 즉 `패스트트랙`과 `필리버스터`다. 공직선거법 개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 등의 검찰개혁 법안을 태운 패스트트랙은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트랩`에 걸렸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라는 필리버스터로 선거법과 공수처법은 물론 `민식이법`을 포함한 모든 민생관련 법안의 흐름을 일거에 멈춰 세워 버린 셈이다.
이 상태로 가면 필리버스터는 블록버스터급 `연말 막장국회 극장`의 민낯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원인제공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여야는 당분간 `강 대 강` 대치를 벌이다가 막판에 가서야 지루한 밀고 당기기와 주고받기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으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수십년간 여의도 정치를 지배해온 `그들만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민식이법`의 더딘 법안 성립은 `참척`의 아픔을 겪은 이해당사자들에게 이중의 고통과 시련을 주며, 선거법의 늑장 처리는 결국 내년 4ㆍ15 총선을 준비 중인 신인 후보자들한테 불리함을 감수하라는 `국회판 갑질` 밖에는 안된다. 지역구에 출마할 후보자들은 선거구 미확정으로 뛰어야 할 운동장 자체가 없어서다. 이달 17일부터 시작되는 총선 예비후보자 등록을 생각한다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현행 국회가 선거법 처리에 성의를 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유권자인 국민은 이번 국회를 끌고 온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마음에 새겨놨다가 내년 봄에 표로 엄격하게 심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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